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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렬

金益烈·Kim Ik-ryeolen·김익열

제주4·3 초기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으로 재직하고, 6·25전쟁과 전후 육군 지휘관 경력을 거쳐 국방대학원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군인. 한자 이름은 金益烈이며, 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육군 중장.

경상남도 하동 출신으로 일본에서 수학하고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뒤 귀국하여,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방경비대 장교로 임관한 인물. 1947년 제주 주둔 제9연대에 부임한 뒤 연대장을 맡아 1948년 4·3 초기에 협상과 선무·귀순공작을 추진한 경력.

1948년 4월 말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과 전투 중지·무장해제·하산자 보호 방안을 협의하고, 오라리 방화의 경위와 진압 방침을 둘러싸고 경찰 및 군정 수뇌부와 갈등한 인물. 5월 5일 수뇌회의 뒤 5월 6일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제9연대장. 협상의 구체 조항과 회의 중 충돌은 자신의 후대 회고를 통해 전해지는 부분이 많아 당시 문서와 공식 조사보고서의 판단을 구분해 읽을 필요가 있는 기록.

6·25전쟁기에 제1사단 제13연대장, 제6사단 제19연대장과 제8사단장을 거쳤으며, 전후 제7사단장과 제1·2군단장 등 지휘관과 군 교육기관의 장을 역임한 군 경력. 국방대학교 공식 역대 원장 명단상 국방대학원장 재임 기간은 1967년 4월 25일부터 1969년 1월 28일까지이며, 196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경력.

예편 뒤 제주4·3에 관한 회고 《4·3의 진실》을 집필하고 1988년 12월 10일 서울에서 사망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인물. 유족이 1989년 공개한 유고는 1994년 《4·3은 말한다》 제2권 부록에 수록되어 초기 4·3 연구의 주요 당사자 증언으로 활용된 기록.

출생연도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정보가 1921년으로 제시하나 1919년으로 적은 자료도 있어 이견이 남아 있는 항목. 정확한 출생 월일은 확정하지 않은 상태.

16 타임라인
6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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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렬

타임라인 16건 · 1921–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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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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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없음 8건

김익렬이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자료포털의 한국역대인물정보가 생몰년을 1921~1988년으로 제시하고, 지역 인물 소개 역시 1921년 출생으로 서술한 인물.

1919년 출생설과 6월 5일이라는 생일 표기도 유통되지만 원기록 대조가 충분하지 않아 월일을 확정하지 않은 연도 단위 기록. 출생연도에 관한 자료 차이가 남아 있는 상태.

김익렬이 소령 계급의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한 경력. 이후 연대장을 맡아 1948년 4·3 발발 당시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의 지휘를 담당한 인물.

제주 부임 때의 부연대장 보직과 뒤의 연대장 취임을 구분한 군 경력으로, 정확한 연대장 취임 월일에는 자료 차이가 남아 있는 이력.

전 제9연대장 김익렬의 《동족의 피로 물드린 제주참전기》가 산업신문에 1948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연재된 기록. 현재의 국제신문이 당시 기고문을 2019년 재수록하면서 확인한 게재 기간이며, 제주4·3평화재단 교육자료에도 8월 6일자 글로 인용된 기록.

사건 직후 현역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글이라는 점에서 예편 뒤 작성한 《4·3의 진실》 유고와 구분되는 자료. 후대 연구가 협상 날짜 등 두 기록의 차이를 검토하는 데 활용한 당사자 기록.

6·25전쟁의 영천 전투 과정에서 김익렬 대령이 지휘한 제6사단 제19연대가 국군의 역습에 참가한 전투 경력. 제19연대는 영천 방어를 맡은 제8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에 참가한 부대.

1950년 9월 9일 아침 제1사단 제11연대와 함께 영천 시내로 진입한 국군의 역습. 제6사단 제19연대장으로서 김익렬이 맡은 역할과 다른 부대의 공동 작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

김익렬이 1988년 12월 10일 서울에서 사망. 국립서울현충원 묘비의 사망일 표기와 후대 묘역 취재 사진으로 확인되는 날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남긴 제주4·3 회고는 사후 유족을 통해 공개되어 《4·3은 말한다》 제2권에 수록된 유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군인.

김익렬이 예편 뒤 집필한 제주4·3 회고 《4·3의 진실》을 유족이 사후 공개한 경과. 1948년 협상과 군·경 및 미군정과의 갈등에 관한 당사자 증언이 더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공개.

생전 집필, 사후 공개, 1994년 단행본 부록 수록이 각각 다른 시점에 이루어진 유고의 전승 과정.

제주도가 김익렬의 부인 최재선과 유족에게 유품 기증에 대한 감사패를 전달한 행사. 경향신문은 다음 날 보도에서 《4·3의 진실》 원고와 집필에 사용한 만년필·안경 등 10점이 제주4·3평화기념관에 기증됐다고 전한 내용.

이 날짜는 감사패 전달일이며, 유고의 집필일이나 최초 공개일과 구분되는 사후 자료 보존의 경과.

제주 4·3 사건 5건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무장대에 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보도의 ‘지난 22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항공 살포일을 4월 22일로 정리한 내용.

《남선신문》 5월 3일자 《靈峰漢拏의 死火山鳴動》 역시 약 일주일 동안 산기슭 일대에 수차례 전단을 뿌렸으며, 향토의 평화 회복을 위해 손을 잡자는 취지의 김익렬 연대장 전단이 다시 살포됐다고 보도한 기록. 이 기사의 5월 3일은 발행일이고 머리말의 통신 발신일은 5월 2일로, 전단 살포 당일과 구분되는 날짜. 협상 권고와 귀순 요구가 이어진 과정에 관한 당시 보도.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이 대정면 구억리에서 만나 무력 충돌의 중단과 무장대의 하산 방안을 협의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가 1948년 4월 28일로 정리한 회담.

김익렬의 회고를 인용한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합의의 주요 내용은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산발적 충돌은 연락 미달로 간주하되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 위반으로 보며, 무장해제는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약속이 깨지면 전투를 재개하며,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내용.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 날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서귀포·성산포 등으로 확대하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하는 구상. 서명된 합의문 원본이 아니라 김익렬의 회고에 따라 전해지는 구체 조항.

회담 뒤에도 납치·살해와 5월 1일 오라리 방화, 군정 수뇌부의 공격 방침 등이 이어지며 지속적인 충돌 중단으로 연결되지 못한 협상. 한편 박찬식의 연구는 1948년에 작성·발표된 김익렬의 《참전기》에 회담일이 4월 30일로 적혔다고 지적한 내용으로, 공식 연표의 4월 28일과 날짜 기록의 차이가 남아 있는 사건.

제주 4·3 사건
1948-05-01 event 현장 조사·보고

오라리 방화 사건

1948년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가옥이 불에 탄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앞선 무장대의 우익계 인사·가족 납치와 살해, 장례식 뒤 우익청년단원들의 방화, 이어진 무장대의 청년단 추격과 경찰 출동을 구분하여 서술하고, 가옥 방화는 우익청년단원들의 행위로 판단한 내용.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김익렬 제9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거쳐 경찰의 후원 아래 우익청년단체가 불을 질렀다고 판단하여 보고한 경위. 당시 경찰은 무장대 소행이라고 보고했으며, 김익렬의 조사 결과와 미군정 측 대응의 구체 경위는 그의 회고와 관계자들의 후대 증언을 함께 토대로 정리된 내용.

불타는 마을을 공중과 지상에서 촬영한 미군 영상 《제주도의 메이데이》가 남아 있는 사건. 공식보고서는 이 영상의 구성과 무장대 책임론을 강경 진압 정당화의 맥락에서 분석한 내용이며, 영상의 존재만으로 미군이 방화를 사전에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입증되는 것은 아닌 자료적 한계. 4월 말 협상이 이행되지 못한 과정의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공격 명령과 지휘관 교체까지 이어진 정책 변화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경위.

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김익렬 제9연대장 등이 참석한 수뇌회의. 딘 일행의 이날 제주 방문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전한 당시 신문 보도로도 확인되는 일정.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인용한 김익렬의 회고에 따르면, 김익렬은 무력에 의한 위압과 선무·귀순공작을 병용하고 무장세력과 일반 주민을 구분하며 경찰을 통합 지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입장. 조병옥의 강경 진압 주장과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맞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는 구체 경위는 김익렬의 회고 증언.

김익렬은 다음 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경과. 당시 방문 보도, 당사자의 후대 회고, 공식보고서의 정책 전환 해석을 서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하는 사건.

1948년 5월 6일 통위부 특명 제52호에 따라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인사. 후임 박진경은 중령으로 취임한 뒤 대령으로 진급한 지휘관.

김익렬이 전날 군정 수뇌회의에서 선무·귀순공작과 경찰 통합지휘를 주장하고 조병옥과 충돌한 뒤 이루어진 교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를 5·10선거를 앞두고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려는 군정 수뇌부의 정책 전환과 연결하여 설명한 내용. 회의 중 충돌만을 유일한 사유로 명시한 인사문서가 확인된 것은 아니며, 연대장직 해임을 군에서의 파면이나 제적으로 확대해서는 안 되는 인사 구분.

후임 박진경의 지휘 아래 진압작전이 확대되고 뒤이어 제11연대 편제로 이어진 부대 개편. 5월 6일의 연대장 교체와 이후의 부대 개편은 서로 구분되는 과정.

국방대학교 2건

김익렬이 제9대 국방대학원장으로 재임을 시작한 경력. 국방대학교의 공식 역대 총장 명단이 재임 기간을 1967년 4월 25일부터 1969년 1월 28일까지로 제시한 보직.

당시 국방대학원은 국가안보와 국방 분야 고급 교육을 담당한 기관. 1968년 7월 23일 졸업식의 대통령 연설문에도 ‘원장 김익렬 장군’으로 호명되어 재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

국방대학교 공식 역대 총장 명단에 따른 김익렬의 국방대학원장 재임 종료. 1967년 4월 25일 시작된 제9대 원장 재임이 마무리된 인사 경력.

김익렬은 196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것으로 소개되는 인물. 이 날짜는 기관의 재임 종료일이며, 별도의 예편 명령 원문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한 예편일과 동일시하지 않은 기록.

4·3은 말한다 2 1건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제2권 《4·3봉기와 거부된 단선》이 전예원에서 발간되고, 권말 부록에 김익렬의 실록유고 《4·3의 진실》이 수록된 출판.

도서관 서지와 당시 출간 보도가 확인하는 1994년 발간 기록. 김익렬의 유고 자체를 1994년에 집필한 별도 단행본으로 혼동하지 않고, 취재반 저술의 부록으로 수록된 형태를 구분한 기록.

그 외 사실들 6건

기록

발언

트리비아

갱신 202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