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선 출생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며, 일제 말에는 방직공장 강제노역을 경험함.
청계피복노조와 노동교실 활동을 지원하고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의 진상규명·명예회복 운동을 이끈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어머니로, 1970년 이후 노동자 단결과 연대에 힘쓴 인물.
이소선(1929~2011)은 청계피복노동조합과 민주화운동 유가족들의 활동을 이끈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어머니로 알려졌으며, 아들의 사망 이후에도 40여 년 동안 노동자 조직과 희생자 가족의 권리를 위해 활동한 인물. 전태일재단이 ‘노동자의 어머니’로 기리는 인물로, 노동자 사이의 단결과 연대를 강조함.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태어나 1947년 전상수와 혼인.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며, 일제 말 방직공장 강제노역을 경험함. 해방 이후에도 행상과 가사노동 등으로 가족의 생계를 꾸림. 이러한 생활 경험은 노동자의 생존 문제를 가까이에서 이해하는 배경.
1970년 전태일의 죽음 뒤 장례와 보상에만 머무르지 않고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을 요구함. 청계피복노조의 유지와 노동교실 운영에 참여하며 노동자들의 교육과 조직 활동을 뒷받침함. 민주노조 운동과 여러 현장의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전노협 고문으로 활동함.
1986년 유가족협의회의 창립을 이끌고 초대 지도자를 맡음. 당시 유가족과 재야 인사들은 전태일기념관에 모여 가족의 죽음을 민주주의와 권리의 문제로 함께 제기함. 이후 의문사 진상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 요구에 참여하면서 노동현장 밖으로 넓어진 활동 영역.
권위주의 정부의 통제와 충돌한 노조 활동. 1980년 대학과 노동자 집회에서 한 연설은 계엄포고 위반으로 처벌됐지만, 2021년 재심에서는 헌정질서를 수호한 정당행위라는 판단으로 무죄가 선고됨. 1981년 노조 해산 뒤 대책을 논의한 사건 역시 2024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됨. 재판부는 당시 계엄포고가 발령 요건과 기본권 보장 원칙을 위반했다고 판단함.
가족의 상실이 노동자와 다른 희생자 가족에 대한 지속적인 연대로 이어진 사례. 2011년 사망했으며 2020년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됨.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어린 시절 부친을 잃고 가난 때문에 학교에 다니지 못했으며, 일제 말에는 방직공장 강제노역을 경험함.
전상수와 혼인하고 이듬해 장남 전태일을 출산함. 이후 태삼·순옥·순덕을 낳아 가족을 이루었으며, 남편의 봉제업이 어려워진 뒤 행상과 가사노동 등으로 생계를 이어감.
전태일 사망 사흘 뒤 근로조건 개선과 노동조합 결성 등을 담은 8개 요구를 제시함. 아들의 뜻이 실현되기 전에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며 시신 인수를 거부한 상황에서 나온 요구. 경찰과 정보기관의 회유에 응하지 않고 전태일의 동료들과 함께 노동자 권리 보장을 요구했으며, 같은 달 청계피복노조 결성으로 이어진 활동.
이소선이 청계피복노조 노동교실 실장으로 위촉됨. 노동교실은 평화시장 일대 봉제노동자들이 교육을 받고 서로 교류하던 노조의 주요 활동 공간. 노조 고문으로 조합원들을 지원해 온 이소선이 노동자 교육과 조직 활동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음.
청계피복노조 해산에 반대하던 이소선이 구속됨. 서울시가 1981년 1월 노조 해산을 명령한 뒤 활동가들이 조직 유지와 대응책을 논의한 것이 처벌의 대상이 됨. 같은 해 7월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았으나, 2024년 12월 서울동부지법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됨. 재심 재판부는 당시 계엄포고의 발령 요건과 내용이 헌법·법률에 위배된다고 판단함.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창립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음. 노동자·학생·청년운동가와 재야 인사, 장기수 등 구속자 가족들이 함께 참여한 단체. 가족의 옥바라지를 넘어 구속자 석방과 인권 보장, 민주화를 공동으로 요구하는 활동으로 확대됨.
전태일기념관에서 민주화운동 희생자 유가족과 재야 인사들이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창립하고 이소선을 초대 의장으로 선임함. 창립 당시 회원은 20여 명으로, 각 가족의 상실을 민주화와 권리 보장의 공동 과제로 제기함. 이소선은 유가족 조직을 통해 희생자 명예회복과 의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활동에 참여함.
유가족들과 국회 앞에서 의문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천막농성에 나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생한 죽음의 경위를 밝히고 희생자들의 명예를 회복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려는 요구. 농성은 1998~1999년에 걸친 장기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노동현장에서 활동해 온 이소선이 다른 유가족들과 함께 지속한 진상규명 운동.
1970년 이후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 유가족 활동에 참여해 온 이소선이 별세함. 장례는 9월 7일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 모란공원의 전태일 묘 인근에 안장됨. 노동계와 유가족, 시민들이 장례와 추모에 참여함.
제33주년 6·10민주항쟁 기념일에 이소선에게 국민훈장 모란장이 추서됨. 노동자 권익 개선에 헌신하고 유가협과 민가협 활동을 통해 인권 신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서훈. 옛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 기념식의 민주주의 발전 유공자 포상에 포함됨.
서울북부지법이 1980년 계엄포고 위반 사건 재심에서 이소선에게 무죄를 선고함. 당시 고려대 시국농성과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하고 노동권 보장을 요구한 활동으로 군사재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던 사건. 재심 재판부는 해당 활동을 헌정질서 파괴에 대항해 헌정질서를 수호한 정당행위로 판단함. 2024년 재심 대상인 1981년 노조 해산 사건과는 별개의 사건.
전태일 사망 이후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이 전국연합노동조합 청계피복지부를 결성함. 작은 봉제업체 노동자들을 시장 단위로 조직하여 장시간 노동과 낮은 임금, 작업장 환경 문제에 대응한 노조.
이소선과 동료 노동자들은 조직의 유지와 노동조건 개선에 참여함. 다수의 여성 조합원들이 교육과 소모임·임금인상 활동을 이끌었지만 공식 지도부는 주로 남성으로 구성되어 노조 내부에도 성별 위계가 남아 있었음.
이소선과 청계피복노조가 노동자 교육을 위한 노동교실을 개관함. 노동교실은 정규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노동자들을 위한 중등교육과 교양교육, 재단·봉제 기술 교육 등을 제공한 공간. 공부와 소모임을 통해 조합원들이 노동조건과 권리 문제를 함께 논의하고 대학생·종교계와 교류하는 기반으로 기능함.
이소선의 구속과 노동교실 봉쇄가 이어진 가운데 청계피복노조 노동자들이 노동교실 반환과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농성함. 노동교실은 평화시장 일대 노동자들이 글과 노동법을 배우고 소모임을 꾸리던 교육·휴식 공간이었으며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과 교류하는 곳이기도 했음.
경찰의 진압과 연행 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하고 조합원들이 구속됨. 여성 노동자 신순애·이숙희·임미경 등도 구속 대상에 포함되었으며, 노동교실 탄압에 대한 종교계·재야의 항의와 연대 활동이 이어짐.
서울동부지법이 이소선의 계엄법 위반 사건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함. 1981년 청계피복노조 해산 명령 이후 노조 사무실 등에서 대책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처벌된 사건으로, 당시 징역형 선고에서 43년이 지난 뒤의 판결.
전태삼 등도 계엄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받았으며 일부 집회·시위법 혐의에는 면소 판결이 내려짐. 재판부는 적용된 계엄포고가 발령 요건과 헌법상 원칙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판단함. 당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조 활동에 대한 처벌을 사법적으로 다시 판단한 결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