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events

이벤트

총 5957건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

6월 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처원 은폐·축소 주도 명동성당 5·18 추모미사가 열린 장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5월 18일 폭로로 고문 가담 경관이 5명이며 경찰이 범인을 2명으로 축소해 발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검찰이 사건을 재수사함. 1987년 5월 29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사건 조작 과정에 깊이 관여한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장 박처원 치안감,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을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함.

앞서 경찰은 황정웅·반금곤·이정호 등 은폐됐던 고문 가담 경관 3명의 신병을 확보해 검찰에 넘겼고, 이들은 5월 21일 구속됨. 이로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범인 축소·은폐에 관련된 구속자는 모두 8명으로 늘어남. 대공수사 지휘라인까지 구속되면서 경찰 내부의 조직적 은폐가 공식적으로 확인됨.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사망한 뒤,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이 사건의 축소·은폐 조작에 관여함. 실제 고문 가담자가 5명이었음에도 경찰은 2명만 가담한 것으로 발표하며 책임을 축소하려 했고, 이 조작은 5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폭로로 무너짐. 박처원은 같은 달 29일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됨.

홍명보가 2014년 7월 10일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의 책임을 지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사퇴함. 한국은 H조에서 러시아와 비기고 알제리·벨기에에 패해 1무 2패, 조 최하위로 대회를 마침.

홍명보는 기자회견에서 사과하고, 대표팀 감독으로서 자신의 역량이 부족했다고 밝힘. 알제리전 뒤 사퇴를 결심했고 벨기에전 직후 대한축구협회에 사의를 전달했다고 설명함. 이 사퇴는 2013년 6월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지 약 13개월 만의 퇴진이었음.

홍명보가 2026년 6월 29일 북중미 월드컵 조별리그 탈락의 책임을 지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에서 사퇴함. 한국은 체코전 승리 뒤 멕시코·남아프리카공화국에 연패해 A조 3위(1승 2패)에 머물렀고, 3위 팀 가운데 32강에 진출하는 8개국에도 들지 못함.

홍명보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과 2026년 북중미 월드컵에서 모두 한국 대표팀을 조별리그 탈락으로 이끈 감독이 됨. 국내 언론은 월드컵 본선을 두 차례 지휘해 두 번 모두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세계 유일 사례로 보도 (FIFA가 공식 인증한 기록은 아님)

사퇴 기자회견에서 준비한 입장문을 통해 결과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으나, 경기 운영과 손흥민 선발 제외 등을 둘러싼 질문은 받지 않은 채 퇴장함. 이에 사퇴의 진정성과 책임 설명이 부족했다는 태도 논란이 확산했고, 2024년 재선임 과정부터 이어진 대한축구협회 운영·선임 절차 논란도 다시 부각됨.

『사상계』가 창간 72주년을 맞아 통권 206호이자 재창간 1호 발행. 1970년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 뒤 약 55년 만의 정식 재출발.

재창간호는 「응답하라 2025!」를 주제로 내세우고, 과거의 지식인 종합지에서 문명전환을 논의하는 종합지로 방향을 새롭게 제시함. 원래 『사상계』의 역사와 별개로 보지 않고, 장기 중단 뒤 이어진 현대적 계승 국면으로 기록할 만 함.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이 문화공보부의 1970년 등록취소처분에 맞서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대법원이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림. 정부는 자체 인쇄시설이 없고 인쇄인 등록 요건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으나, 『오적』 필화 뒤 잡지 발행을 차단한 조치라는 점에서 정치적 탄압 논란이 컸음.

판결로 법적으로는 복간의 길이 열렸지만, 재정난과 필자·인쇄소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사상계』는 속간하지 못함. 강제 폐간이 단순한 경영 실패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행정처분과 맞물린 사건이었음을 확인하는 후속 국면.

사상계

『사상계』는 1970년 5월호 통권 205호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게재함. 작품은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의 부패와 유착을 풍자했으며, 6월 김지하와 사장 부완혁, 편집담당 김승균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됨.

문화공보부는 같은 해 9월 29일 『사상계』의 등록을 무효 처리하며 발행을 막음. 창간 17년 만에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 것. 발행인 부완혁은 뒤에 등록무효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해 1972년 4월 대법원에서 승소했으나, 『사상계』는 끝내 복간되지 못함. 박정희 정권기 언론·표현 탄압의 한 결과.

사상계

장준하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국회의원 겸직 문제에 따라 『사상계』의 발행권을 부완혁에게 넘김. 부완혁은 같은 해 12월부터 발행인 겸 사장을 맡아 잡지를 운영함.

이는 창간 이래 장준하가 직접 이끌어 온 『사상계』의 경영·발행 체제가 바뀐 전환점. 다만 『사상계』의 비판적 논조와 정치적 성격은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1970년 김지하의 「오적」 게재와 필화 사건, 강제 폐간으로 이어지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사상계

장준하가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함. 수상 부문은 언론·문학·창조적 커뮤니케이션 예술 분야로, 『사상계』를 통해 전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민족 문제·지식인 책임을 공론화한 언론 활동이 국제적으로 평가받은 결과.

막사이사이상은 필리핀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리기 위해 1957년 제정된 아시아의 공공봉사·지도력 관련 국제상. 장준하의 수상은 『사상계』가 국내 지식인 사회의 영향력 있는 종합지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적 차원에서도 주목받았음을 보여주는 사건.

사상계

『사상계』는 함석헌·천관우 등 비판적 지식인의 글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권위주의 통치, 분단 현실과 민주주의의 과제를 꾸준히 다룸. 이러한 논의는 학생·지식인층 사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성찰하는 지적 토대를 형성함.

4·19 혁명 뒤에는 학생과 시민의 저항을 민주혁명으로 해석하고, 새 민주정치의 방향과 장면정부의 과제를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지면을 마련함. 『사상계』가 혁명을 직접 조직한 주체는 아니었으나, 4·19 전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담론을 형성하고 확산한 대표적 종합교양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됨.

함석헌이 『사상계』 1958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6·25전쟁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발표함. 글은 한국전쟁을 미·소 냉전 질서 속의 비극으로 바라보고, 반공·북진통일 구호 아래 비판을 억누르던 이승만 정권의 정치 환경을 비판함.

경찰은 8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함석헌을 구속하고,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연행해 조사함. 함석헌은 8월 25일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됨.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정 추진과 맞물려 벌어진 대표적 필화 사건으로, 『사상계』가 권위주의 정권 비판의 공론장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 계기.

장준하가 피난 수도 부산에서 국민사상연구원 기관지 『사상』을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로 바꾸고 월간 종합지로 창간함. 민족 통일, 민주사상 함양, 경제 발전을 편집의 기본 방향으로 내세우며 정치·경제·사회·문학·철학·예술을 아우르는 지면을 구성함.

『사상계』는 전후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민족 문제를 토론하는 대표적 공론장으로 성장했으며, 장준하의 언론인·사상가·민주화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상징하는 핵심 매체가 됨.

사상계

한국전쟁 중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로 월간 『사상』이 창간됨. 장준하는 연구원에서 잡지의 편집을 맡아 국민사상의 통일, 자유민주주의의 확립, 반공정신의 함양 등을 내세운 전시기 지식인 대상 사상지 발간에 참여함.

『사상』은 통권 4호까지 발행된 뒤, 장준하가 1953년 4월 이를 단독 인수해 『사상계』로 제호를 바꾸면서 독립적인 종합교양지의 전신이 됨.

사상계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1987년 6월 29일 시국수습을 위한 8개 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함. 여야 합의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새 헌법에 따른 대선 실시, 공정 경쟁을 위한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기본권 강화, 언론 자유 보장, 지방·교육 자치, 정당 활동 보장 등을 제시함. 전두환의 재가 아래 6월항쟁의 핵심 요구를 사실상 수용한 조치로, 5공화국 권위주의 체제의 후퇴와 민주화 이행을 결정지은 분기점.

전두환 직선제 수용 결정 6월 민주항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