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이사회가 파리에서 대한민국을 29번째 회원국으로 초청하기로 만장일치로 결정함. 가입 심사 완료에 따른 결정으로, 대한민국은 10월 25일 가입 협정에 서명하고 12월 12일 정식 회원국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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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잔 주느비에브 라브로스가 열기구에서 낙하산을 이용해 하강함. 기록상 여성 최초의 낙하산 강하로 알려진 성과로, 18세기 말 열기구와 낙하산을 이용한 비행 실험이 확대되던 시기의 중요한 기술사적 사례.
제2차 보어 전쟁 발발
남아프리카의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이 영국과 전쟁에 돌입함. 영국 제국의 남아프리카 지배 확대와 보어 공화국의 독립을 둘러싼 대립이 전면전으로 확대된 사건으로, 1902년 베르니이헝 조약까지 전쟁이 이어짐.
대한민국 공군기술학교가 자체 설계·제작한 경비행기 부활호가 첫 비행에 성공함. 한국전쟁 직후 제한된 자재와 기술 기반 속에서 이루어진 국산 항공기 개발 성과로, 대한민국 항공산업 초기의 중요한 이정표.
6·25전쟁의 영천 전투 과정에서 김익렬 대령이 지휘한 제6사단 제19연대가 국군의 역습에 참가한 전투 경력. 제19연대는 영천 방어를 맡은 제8사단에 배속되어 작전에 참가한 부대.
1950년 9월 9일 아침 제1사단 제11연대와 함께 영천 시내로 진입한 국군의 역습. 제6사단 제19연대장으로서 김익렬이 맡은 역할과 다른 부대의 공동 작전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
김익렬의 제주 주둔 제9연대 부임
김익렬이 소령 계급의 제9연대 부연대장으로 제주에 부임한 경력. 이후 연대장을 맡아 1948년 4·3 발발 당시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의 지휘를 담당한 인물.
제주 부임 때의 부연대장 보직과 뒤의 연대장 취임을 구분한 군 경력으로, 정확한 연대장 취임 월일에는 자료 차이가 남아 있는 이력.
김익렬 유고 《4·3의 진실》 공개
김익렬이 예편 뒤 집필한 제주4·3 회고 《4·3의 진실》을 유족이 사후 공개한 경과. 1948년 협상과 군·경 및 미군정과의 갈등에 관한 당사자 증언이 더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공개.
생전 집필, 사후 공개, 1994년 단행본 부록 수록이 각각 다른 시점에 이루어진 유고의 전승 과정.
팬스타 아크로호가 2026년 8월 22일 부산항에서 출항한 뒤 북극해 북동항로를 거쳐 유럽 항만에 기항하고 10월 11일 부산항으로 귀항하며 약 50일간의 왕복 시범운항을 완료함. 영국 펠릭스토우, 네덜란드 로테르담, 폴란드 그단스크 등을 거쳐 돌아온 한국 컨테이너선의 첫 북극항로 유럽 왕복 실증 사례. 정부는 항해 경로·운항시간·연료비 등 운항 데이터를 분석해 정기 항로의 타당성을 검토할 방침임. 이번 운항 완료는 기술적·운항상 실증 성과이며 정기 상업항로의 경제성 확보나 개설 완료를 의미하지 않음.
슬로베니아에서 의회조사법 개정안(ZPPre-B)에 관한 구속력 있는 국민투표가 실시돼 개정안 반대가 과반을 차지함. 10월 12일 오전 잠정 집계에서 반대 51.26%, 찬성 48.74%로 나타났으며, 법률 부결에 필요한 전체 유권자 5분의 1 이상의 반대표 요건도 충족함. 같은 날 사회부조 수급 조건·지방선거 투표권·공영방송 수신료에 관한 자문 국민투표 세 건도 함께 실시됨. 수치는 공식 확정 전 잠정 개표 결과로 후속 확정 결과 확인 필요.
제주도가 김익렬의 부인 최재선과 유족에게 유품 기증에 대한 감사패를 전달한 행사. 경향신문은 다음 날 보도에서 《4·3의 진실》 원고와 집필에 사용한 만년필·안경 등 10점이 제주4·3평화기념관에 기증됐다고 전한 내용.
이 날짜는 감사패 전달일이며, 유고의 집필일이나 최초 공개일과 구분되는 사후 자료 보존의 경과.
김익렬의 국방대학원장 재임 시작
김익렬이 제9대 국방대학원장으로 재임을 시작한 경력. 국방대학교의 공식 역대 총장 명단이 재임 기간을 1967년 4월 25일부터 1969년 1월 28일까지로 제시한 보직.
당시 국방대학원은 국가안보와 국방 분야 고급 교육을 담당한 기관. 1968년 7월 23일 졸업식의 대통령 연설문에도 ‘원장 김익렬 장군’으로 호명되어 재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
김익렬의 국방대학원장 재임 종료
국방대학교 공식 역대 총장 명단에 따른 김익렬의 국방대학원장 재임 종료. 1967년 4월 25일 시작된 제9대 원장 재임이 마무리된 인사 경력.
김익렬은 1969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것으로 소개되는 인물. 이 날짜는 기관의 재임 종료일이며, 별도의 예편 명령 원문을 확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정확한 예편일과 동일시하지 않은 기록.
김익렬의 국방경비대 장교 임관
일본군 복무와 귀국을 거친 김익렬이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한 경력. 미군정기 군 조직에서 시작해 대한민국 육군으로 이어진 군 경력의 초기 단계.
소개 자료 사이에 임관 월일의 차이가 있어 연도 수준으로 기록한 사건.
《4·3은 말한다》 제2권의 김익렬 유고 수록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 제2권 《4·3봉기와 거부된 단선》이 전예원에서 발간되고, 권말 부록에 김익렬의 실록유고 《4·3의 진실》이 수록된 출판.
도서관 서지와 당시 출간 보도가 확인하는 1994년 발간 기록. 김익렬의 유고 자체를 1994년에 집필한 별도 단행본으로 혼동하지 않고, 취재반 저술의 부록으로 수록된 형태를 구분한 기록.
전 제9연대장 김익렬의 《동족의 피로 물드린 제주참전기》가 산업신문에 1948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연재된 기록. 현재의 국제신문이 당시 기고문을 2019년 재수록하면서 확인한 게재 기간이며, 제주4·3평화재단 교육자료에도 8월 6일자 글로 인용된 기록.
사건 직후 현역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글이라는 점에서 예편 뒤 작성한 《4·3의 진실》 유고와 구분되는 자료. 후대 연구가 협상 날짜 등 두 기록의 차이를 검토하는 데 활용한 당사자 기록.
조선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교체
1948년 5월 6일 통위부 특명 제52호에 따라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인사. 후임 박진경은 중령으로 취임한 뒤 대령으로 진급한 지휘관.
김익렬이 전날 군정 수뇌회의에서 선무·귀순공작과 경찰 통합지휘를 주장하고 조병옥과 충돌한 뒤 이루어진 교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를 5·10선거를 앞두고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려는 군정 수뇌부의 정책 전환과 연결하여 설명한 내용. 회의 중 충돌만을 유일한 사유로 명시한 인사문서가 확인된 것은 아니며, 연대장직 해임을 군에서의 파면이나 제적으로 확대해서는 안 되는 인사 구분.
후임 박진경의 지휘 아래 진압작전이 확대되고 뒤이어 제11연대 편제로 이어진 부대 개편. 5월 6일의 연대장 교체와 이후의 부대 개편은 서로 구분되는 과정.
김익렬 사망
김익렬이 1988년 12월 10일 서울에서 사망. 국립서울현충원 묘비의 사망일 표기와 후대 묘역 취재 사진으로 확인되는 날짜.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남긴 제주4·3 회고는 사후 유족을 통해 공개되어 《4·3은 말한다》 제2권에 수록된 유고.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군인.
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김익렬 제9연대장 등이 참석한 수뇌회의. 딘 일행의 이날 제주 방문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전한 당시 신문 보도로도 확인되는 일정.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인용한 김익렬의 회고에 따르면, 김익렬은 무력에 의한 위압과 선무·귀순공작을 병용하고 무장세력과 일반 주민을 구분하며 경찰을 통합 지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입장. 조병옥의 강경 진압 주장과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맞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는 구체 경위는 김익렬의 회고 증언.
김익렬은 다음 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경과. 당시 방문 보도, 당사자의 후대 회고, 공식보고서의 정책 전환 해석을 서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하는 사건.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무장대에 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보도의 ‘지난 22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항공 살포일을 4월 22일로 정리한 내용.
《남선신문》 5월 3일자 《靈峰漢拏의 死火山鳴動》 역시 약 일주일 동안 산기슭 일대에 수차례 전단을 뿌렸으며, 향토의 평화 회복을 위해 손을 잡자는 취지의 김익렬 연대장 전단이 다시 살포됐다고 보도한 기록. 이 기사의 5월 3일은 발행일이고 머리말의 통신 발신일은 5월 2일로, 전단 살포 당일과 구분되는 날짜. 협상 권고와 귀순 요구가 이어진 과정에 관한 당시 보도.
김익렬 출생
김익렬이 경상남도 하동에서 출생.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자료포털의 한국역대인물정보가 생몰년을 1921~1988년으로 제시하고, 지역 인물 소개 역시 1921년 출생으로 서술한 인물.
1919년 출생설과 6월 5일이라는 생일 표기도 유통되지만 원기록 대조가 충분하지 않아 월일을 확정하지 않은 연도 단위 기록. 출생연도에 관한 자료 차이가 남아 있는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