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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워싱턴에서 변영태 외무부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국무장관이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서명함. 이승만 정부가 정전 이후의 재침략 가능성에 대비해 요구한 안보 보장이 제도화되는 단계였으며, 8월 가조인과 양국의 후속 교섭을 거쳐 이루어짐.

조약은 외부 무력공격의 위협에 대한 협의와 공동 대응, 상호 합의에 따른 미군의 한국 주둔 근거를 마련했음. 다만 제3조는 각국의 헌법상 절차에 따라 공동 위험에 대응하도록 규정했으므로, 무조건적인 자동 참전을 약속한 문서로 표현할 수 없음. 미국 역시 한국의 일방적인 북진으로 다시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통제 장치를 추구했으며, 한미동맹은 안보 지원과 한국군 통제에 관한 협상의 결과로 형성됨.

이승만

이승만이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으로,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한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기는 뜻을 전달함. 북한군의 남진과 미군 참전 속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지휘체계를 통합하기 위한 조치였음.

이양은 연합작전을 가능하게 했으나 한국 정부와 군의 독자적 군사행동에도 제약을 두었음. 정전 협상기에 이승만이 지휘권 회수를 압박 수단으로 거론하면서 한미 간 갈등의 핵심이 되었고, 전후 한미합의의사록을 통한 작전통제 관계로 이어짐.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한다는 제헌헌법의 원칙을 구체화한 농지개혁법이 법률 제31호로 공포됨. 직접 경작하지 않는 지주의 농지 등을 정부가 사들여 농민에게 분배하는 유상매수·유상분배 방식과 가구당 3정보의 소유 상한을 중심으로 농촌의 토지 소유질서를 바꾸려 한 법률임.

이승만 정부의 주요 사회경제 개혁이었지만, 대통령 한 사람의 구상으로 이루어진 일은 아니었음. 해방 이후 농민의 토지 요구, 북한의 토지개혁, 미군정의 귀속농지 분배가 선행했고, 조봉암이 이끈 농림부와 국회가 법안 형성에 참여했음. 정부·국회·지주층 사이의 보상과 상환 조건을 둘러싼 갈등 때문에 법은 1950년 3월 다시 개정되었으며, 그해 농지 분배가 본격화됨.

농지개혁은 지주·소작 관계를 크게 약화시키고 자작농 중심의 토지 소유체제를 형성한 중요한 변화였음. 다만 개혁 이전의 토지 매각, 전쟁, 농민의 상환 부담과 영세한 경영 규모 때문에 효과와 한계가 함께 나타났으며, 보상·상환·소유권 이전까지 같은 날 완료된 것은 아니었음.

1949년 제정법과 1950년 시행된 개정법의 상환 조건은 구별해야 함. 1950년 개정 후 매수·분배 가격은 평년 생산량의 150%, 상환·보상 기간은 5년을 기준으로 하였음. 법 공포일인 1949년 6월 21일을 농지개혁 전체의 단일 완료일로 이해할 수 없음.

이승만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은 국민보도연맹원과 요시찰인 등을 예비검속한 뒤 여러 지역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살해했음. 국가 조사기구는 이를 국가기관에 의한 불법 민간인 집단희생으로 규명했음.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의 군과 경찰은 국민보도연맹원 및 좌익 혐의자로 분류된 주민들을 연행·구금했음. 국민보도연맹은 정부가 전향자를 지도·관리한다는 명목으로 1949년 조직한 관변단체였으나, 좌익 활동과 무관한 주민도 가입되어 있었음. 전쟁 초기 이 명부와 요시찰인 분류가 예비검속의 근거로 활용됨.

각 지역의 경찰, 육군 정보국 소속 방첩대인 CIC, 헌병대 등은 구금자를 야산과 골짜기, 해상 등으로 이송해 재판 없이 살해했음. 진실화해위원회는 김해에서 1950년 6월 하순부터 9월 중순까지, 부산·사천에서 7~9월에 발생한 희생을 각각 조사했음. 울산 사건에서는 경찰과 울산지구CIC가 구금자들을 집단 총살한 사실을 확인했고, 위법 행위에 대한 확인이나 적법한 처리 절차 없이 이루어진 불법 처형으로 판단했음.

울산 사건 결정에서 진실화해위원회는 직접 총살명령을 울산지구CIC가 내리고 현장 군·경이 집행했으며, 지휘·명령은 상급기관인 육군본부 정보국에서 하달된 것으로 판단했음. 이어 계엄 지휘체계와 대통령에게 귀속되는 최종 책임을 구분하여 명시했음. 이는 국가의 조직적 가해와 통수 책임을 밝힌 조사 결과이며, 지역별로 규명된 명령 경로와 피해 규모를 전국의 모든 사건에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음.

이승만

무장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습격해 조사 인력을 체포했음. 이승만은 특경대 해산 지시를 인정했고, 친일행위 조사와 처벌은 급격히 위축됨.

1949년 6월 6일 서울 중부경찰서장 윤기병이 이끄는 무장 경찰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본부를 습격했음. 전날 경찰 지휘부는 시경국장 김태선을 거쳐 내무차관 장경근에게 특경대 강제 해산 계획을 알리고 허락을 받았음. 경찰은 특위 요원들을 연행하고 특경대의 무장을 해제했으며, 연행된 사람들은 구금 중 가혹행위를 당했음. 국회가 1948년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설치한 조사기구가, 수사 대상인 친일 경찰 세력을 포함한 경찰 조직의 공격을 받은 사건이었음.

습격 전부터 이승만은 반민특위가 현직 경찰을 조사·처벌하는 데 반대하며 특경대 해산을 요구했음. 습격 이후에는 경찰의 행동이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밝힘. 국회는 정부 책임을 추궁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으나,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소장파 의원들이 체포되고 정부·경찰의 압박이 이어지면서 조사 활동을 지킬 힘은 약해짐.

이후 반민족행위처벌법의 공소시효가 단축되고 위원들이 사퇴하면서 반민특위의 활동은 사실상 마비됨. 6·6 사건은 친일 청산이 좌절되는 결정적 계기이자, 이승만 정부가 반공과 치안 유지를 내세워 식민지 시기 경찰 인력을 보호하고 입법부의 조사 활동을 제약한 사례로 남았음.

이승만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선포됨. 5·10 총선거, 제헌국회 구성, 7월 17일 헌법 공포, 7월 20일 정·부통령 선출과 내각 구성에 이어 이루어진 정부 출범이었음.

해방 직후의 미·소 분할 점령과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거치며 남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되는 방향이 굳어졌음.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한국인의 정부와 헌정체제를 마련한 사건이면서, 9월 9일 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분단국가 체제가 성립한 과정의 일부임. 이승만이 추진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은 통일정부를 우선했던 독립운동 동료들과의 결별을 수반했음.

이승만

이승만이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북을 포괄하는 정부 구성이 어려워진 상황을 들어,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 등을 조직하자는 구상을 공개적으로 제시함.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중단된 뒤 나온 발언으로, 남한 단독정부 수립 노선이 드러난 중요한 계기였음.

이 발언은 이미 진행 중이던 미국과 소련의 분할 점령, 신탁통치를 둘러싼 대립, 남북의 정치체제 재편 속에서 나왔음. 이승만은 남한의 정치적 기반을 먼저 마련해 소련의 철수와 통일을 추진한다는 논리를 폈으나, 통일정부 수립을 우선한 세력과의 거리는 커졌음. 분단의 원인을 한 사람의 발언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후 단독선거와 정부 수립을 지지한 그의 선택을 보여 주는 사건임.

이승만이 1945년 10월 16일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개인 자격의 귀국임을 밝히고 자주독립과 단결을 호소했음.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했음. 1912년 미국으로 떠난 뒤 33년 만의 귀국이었음. 일본의 패전과 해방으로 독립운동의 과제가 국내에서 어떤 국가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로 바뀌던 시기에, 오랫동안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정치지도자가 국내 정치무대로 들어온 것임.

이튿날인 10월 17일, 이승만은 미군정청에서 존 하지 중장과 아널드 소장의 소개로 기자회견을 했음. 그는 자신이 임시정부 대표나 외교기관 책임자의 지위로 온 것이 아니라 평민의 자격으로 돌아왔다고 밝힘. 국내 사정은 차차 알아가겠다고 말하면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한 동포들의 협력과 단결을 강조했음.

이 기자회견은 귀국과 동시에 이승만이 어떤 자격과 명분으로 국내 활동을 시작했는지 보여주는 자료임. 장기간의 해외활동에서 국내의 자주독립국가 수립 운동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는 전환점이 됨.

워싱턴에서 대한인자유대회가 개막했음. 이승만은 개회사를 맡았고, 참가자들은 미국에 임시정부 승인과 연합국 일원으로서의 지위 인정을 요구했음.

1942년 2월 27일, 워싱턴에서 대한인자유대회가 열림. 주미외교위원부와 재미한족연합회, 한미협회가 주최한 대회는 3월 1일까지 계속됨.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김호가 회장을 맡고, 주미외교위원장 이승만이 개회사를 했음.

참가자들은 3·1운동의 독립 의지를 재확인하고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했음. 또한 미국 대통령과 의회에 임시정부 승인을 청원하고, 한국이 연합국선언에 참여한 나라들과 함께 활동할 자격을 인정받도록 요구했음. 태평양전쟁 발발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에 들어간 상황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연합국의 전쟁 수행과 연결하려는 시도였음.

대회는 교민사회의 지지와 미국 인사들의 관심을 모으는 외교·선전 활동의 장이었음. 그러나 대회 결의 자체가 미국 정부의 승인이나 한국의 정식 참전을 뜻한 것은 아니었음. 임시정부의 국제적 지위를 확보하는 문제는 해방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미외교위원부 설치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에게 대미교섭의 전권을 부여했음.

1941년 6월 4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에 주미외교위원부를 설치하는 규정을 공포하고 이승만을 위원장으로 임명했음. 임시정부는 신임장을 통해 그에게 미국과 교섭할 전권을 맡겼음. 이승만은 이전부터 사용한 Korean Commission이라는 대외 명칭을 이어갔지만, 이 조직은 1919년 구미위원부와 구분되는 제도적 근거를 갖추었음. 같은 해 그는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하여 일본의 팽창정책이 미국과의 충돌로 이어질 위험을 경고했음.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 대일전쟁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여할 자격, 한국광복군에 대한 군사 지원을 확보하려 했음.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재미한인이 일본인과 같은 적성외국인으로 취급되지 않도록 지위를 개선하는 일에도 힘썼음. 이승만은 미국인 후원단체를 활용한 여론 활동과 미국 정부를 향한 청원을 병행했음.

그러나 미국 정부의 임시정부 불승인 방침은 바뀌지 않았음. 주미외교위원부의 활동은 한국 독립의 요구와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는 데 기여했지만, 독립운동 측이 원한 정부 승인과 공식 참전 지위를 확보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음.

이승만

이승만이 국제연맹 사무총장에게 한국과 만주의 한인 문제를 제기하는 서한을 보내고, 일본의 대륙 침략과 한국 독립의 연관성을 호소했음.

1933년 2월 8일, 제네바에 머물던 이승만은 국제연맹 사무총장 에릭 드러먼드에게 서한을 보냄. 일본의 만주 침략이 국제연맹에서 논의되던 때에, 한국의 식민지화와 만주에 사는 한인들의 처지가 그 문제와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음. 같은 날 미국 국무장관 헨리 스팀슨에게도 한국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달라고 요청했음.

그는 1932년 11월 임시정부의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된 뒤 유럽으로 향했음. 제네바에서는 언론인과 외교관을 만나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알렸으며, 리튼보고서를 검토하여 《만주의 한국인들》(The Koreans in Manchuria)을 펴냈음. 책과 서한에서 만주 한인의 국적·토지·이주 문제를 일본의 팽창정책과 연결하여 설명했음.

이 활동은 국제연맹이 다루던 만주 문제 속에 한국인의 목소리를 포함시키려는 외교적 시도였음. 그의 활동과 별개로 국제연맹은 리튼보고서를 채택하였고 일본은 탈퇴의 길을 택했음. 한국의 독립이나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은 이 과정에서 실현되지 않았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탄핵 심판서를 가결하여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했음.

1925년 3월 23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은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직에서 면직한다는 탄핵 심판서를 통과시켰음. 장기간 미국에 머문 대통령과 상하이 임시정부 사이의 권한·재정 갈등, 독립운동 방략에 관한 대립이 누적된 결과였음.

탄핵안은 미주 교민의 인구세 처리와 정부 재정 수입 방해, 미주 지역 정무를 임시정부에서 분리하려 한 행동, 임시헌법과 임시의정원의 권한을 부정한 점 등을 사유로 제시했음. 심판위원회는 상하이를 떠나 직무를 충분히 수행하지 않은 점과 정부의 행정·재정을 방해한 점도 지적했음. 위임통치 청원을 둘러싼 논란이 갈등의 배경이었다면, 최종 탄핵 심판은 정부 운영과 헌법·의정원 권한을 둘러싼 구체적인 행위들을 문제 삼았음.

탄핵은 대통령의 임기가 명시되지 않았던 임시정부 체제에서 지도부를 교체하기 위한 절차이기도 했음. 이 결정으로 이승만의 임시대통령 재임은 끝남. 이후에도 그는 하와이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임시정부와의 관계는 새로운 외교 직책을 맡는 과정을 거쳐 다시 조정됨.

이승만

이승만이 이끄는 한국대표단이 워싱턴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다루어 달라는 호소문을 작성함.

1921년 12월 1일자로 작성된 한국대표단의 호소문은 워싱턴 군축회의에서 한국의 독립 문제를 다루어 달라고 요청함. 문서는 한국에 대한 불의가 해결되지 않으면 동아시아의 평화도 보장되기 어렵다고 주장하고, 회의에서 한국인의 진술을 들을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음. 이승만과 서재필, 정한경, 미국인 고문 프레드 돌프와 찰스 토머스의 이름이 문서에 실려 있음.

호소문은 미국을 비롯한 열강이 과거 한국과 맺은 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을 중요한 근거로 제시했음. 이를 통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단순한 일본 국내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 약속과 동아시아 질서의 문제로 다루려 했음. 문서는 미국 상원의 공식 인쇄물로도 남아 있음.

그러나 이러한 청원과 선전에도 불구하고 한국대표단은 회의의 정식 참가국 대표로 인정받지 못했고, 한국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올리는 데에도 실패했음. 워싱턴회의 외교는 국제 여론에 한국 문제를 알린 시도인 동시에, 승전국과 강대국 중심 국제회의에 기대었던 독립 외교의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음.

이승만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동지회 결성을 주도했음. 동지회는 임시정부 옹호와 교민 단결을 표방하며 그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했음.

1921년 7월, 이승만이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인동지회 조직을 주도했음.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지도체제와 독립운동 방략을 둘러싼 갈등을 겪고 하와이로 돌아온 직후였음. 단체는 임시정부를 옹호하고 교민의 단결을 도모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는 인사들을 결집시켰음.

동지회는 《태평양잡지》를 활동의 매개로 삼고, 1924년 하와이 한인대표회를 계기로 조직과 정강을 정비했음. 정치적 독립운동 지원과 함께 교민의 경제적 역량을 키우려 했으며, 동지식산회사 운영과 동지촌 건설도 추진했음. 그러나 자본 부족과 경영난 속에 회사가 파산하면서 경제적 자립 구상은 좌절됨.

동지회는 이후에도 이승만의 중요한 정치적 후원조직으로 남았음. 동시에 다른 한인 단체들과 대표권과 재정, 외교활동의 주도권을 놓고 갈등을 겪었음. 하와이 활동은 교육과 독립운동의 기반을 넓히는 과정이면서, 교민사회의 분열과 지도권 경쟁이 함께 나타난 과정이었음.

임시의정원이 대통령제를 채택하는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음. 새 헌법과 정부 명단은 9월 11일 공포됨.

1919년 9월 6일, 상하이 임시의정원이 정부 통합을 위한 헌법 개정안을 의결하고 이승만을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했음. 이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 계통을 하나로 묶으려는 협상의 결과였음. 국무총리 중심의 초기 조직은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두는 체제로 바뀜.

9월 11일에는 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법과 새 국무원의 명단이 공포됨. 임시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였고, 안창호 등 여러 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통합 정부에 참여했음. 다만 정부가 통합되었다고 해서 독립운동 방략과 지도체제에 관한 이견까지 해소된 것은 아니었음.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다가 1920년 12월 상하이에 왔음. 약 반년의 체류 동안 임시정부의 재정과 권한, 대외활동 방향을 놓고 다른 지도자들과 충돌했음. 선출일인 9월 6일, 헌법 공포일인 9월 11일, 실제 상하이 부임은 서로 다른 시점임.

이승만

이승만이 집정관총재 명의의 공포문으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구미 각국을 상대로 독립 외교와 선전, 자금 모집을 수행하기 위한 기관이었음.

1919년 8월 25일, 이승만은 집정관총재 공포문 제2호에 따라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했음.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라는 지위에 근거한 조치였으며,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펼친 김규식이 위원장을 맡음. 이 조직은 한국의 독립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미국과 유럽에 알리는 외교 창구로 활동했음.

구미위원부는 미국 정부와 의회에 청원하고, 간행물과 강연을 통해 일본의 식민통치를 비판했으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음. 미국의 여론과 정책에 영향을 미쳐 한국 문제를 국제정치의 의제로 만들려는 이승만의 외교독립 노선이 조직 형태를 갖춘 것임.

한편 구미위원부의 설치 절차와 운영, 미주에서 모인 재정의 처리 문제는 상하이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켰음. 1925년 이승만 면직 뒤 임시정부는 폐지를 결정했으나 이승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활동을 계속했음. 이후 1941년 설치된 주미외교위원부는 임시정부가 공포한 별도 규정에 근거한 기관이었음.

이승만

이승만이 운영하던 하와이의 교육사업이 남녀공학 한인기독학원으로 확대됨. 한인 자녀의 한국어 교육과 민족교육을 위한 기반이었음.

1918년 9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교육기관이 한인기독학원이라는 이름으로 개편됨. 이승만이 1914년 여학생 기숙사를 마련하고 한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한 사업이 그 토대였음. 대한인국민회의 지원과 교민사회의 자원을 바탕으로 학교 부지와 교사가 마련되었고, 남녀가 함께 배우는 민족교육기관으로 발전했음.

이승만은 1913년부터 하와이에서 한인 교육과 종교 활동에 힘을 기울였음. 학교와 교회, 한글 간행물은 이민사회에서 언어와 공동체 의식을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기반이 됨. 다만 학원 운영은 재정난을 동반했음. 1923년 학생 고국방문단을 보내 모금하는 과정에서는 일본 영사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문제 때문에 독립운동 원칙과의 충돌을 지적하는 교민사회의 반대도 일어남.

이승만과 정한경이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어 달라는 청원서를 보냄.

1919년 2월 25일, 이승만과 정한경이 대한인국민회 대표 명의로 파리강화회의에 청원서를 작성했음.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에게도 같은 취지의 서한을 보냄. 파리행 여권을 얻지 못한 두 사람은 서면으로 일본의 한국 지배가 부당하다고 호소하고, 장래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 아래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제안했음.

청원은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 국제적 보장을 거쳐 독립에 이르겠다는 단계적 외교방안이었음. 그러나 즉각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지향하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다른 외부 통치를 스스로 요청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강한 비판을 불렀음. 이승만이 임시정부 지도자로 선출된 뒤에도 위임통치 청원 문제는 그의 지도력과 외교노선을 둘러싼 갈등의 중요한 쟁점으로 남았음.

문서가 작성된 때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이전이었음. 청원은 뒤에 세워진 임시정부 명의가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대표 명의로 이루어짐. 청원의 내용과 작성 사실은 원문으로 확인되지만, 그것이 현실적인 차선책이었는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훼손한 선택이었는지는 평가가 갈림.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미국에서 이어 온 학업을 통해 국제법과 외교사를 연구했음.

1910년 6월 14일, 이승만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프린스턴 대학기록실이 공개한 학적카드에는 학위 수여일이 이날로 적혀 있음. 그는 조지워싱턴대학교 학부를 마친 뒤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08년 가을 프린스턴에 입학했음.

그의 박사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었음. 국제법과 외교사를 공부한 학업은 이후 미국 정부와 국제회의를 상대로 펼친 독립 외교의 지적 배경이 됨. 논문 출판은 학위 취득과 별개로 진행되어 1912년에 이루어짐. 프린스턴 기록실은 당시 이승만이 출판 비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관련 서신으로 설명함.

석방된 이승만이 미국 유학과 대한제국의 독립 보전을 위한 외교활동을 위해 서울을 떠남.

1904년 11월 4일, 이승만이 미국으로 가기 위해 서울을 출발했음.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이 번역한 영문일기는 이날 오후 서울에서 출발하는 기록으로 시작함. 그는 같은 해 8월 한성감옥에서 풀려난 뒤, 민영환과 한규설 등의 도움을 받아 미국에 한국의 독립 보전을 호소할 길을 찾았음.

그의 미국행은 유학과 외교활동이 함께 진행되는 출발점이었음. 1905년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한 뒤 미국 정부 관계자들에게 한국 문제를 알렸고, 같은 해 8월에는 윤병구와 함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 독립 보전을 요청했음. 그러나 미국의 대일 정책을 바꾸거나 한국의 주권을 보호할 구체적 성과를 얻지는 못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