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아 양국 정부가 2005년을 ‘한일 우정의 해’로 지정해 교류 사업을 진행하던 가운데 야마노 샤린의 『만화 혐한류』가 일본에서 출간됨. 독도·한일병합·역사인식 등 한일 현안을 한국에 비판적인 시각으로 다룬 작품이 큰 판매량을 기록하며 한국에서도 역사왜곡과 반한 정서 확산 문제로 논란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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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요시로 일본 총리가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 방문과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KBS 인터뷰에서 독도가 역사적 사실과 국제법상 일본의 고유 영토라는 일본 정부 입장을 주장함. KBS는 정상회담에 미칠 파장을 고려해 9월 21일 방송에서 해당 부분을 삭제했으며, 이후 삭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발생함.
보른·오펜하이머, '분자의 양자론' 논문 발표
막스 보른과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논문 「분자의 양자론(Zur Quantentheorie der Molekeln)」을 발표함. 원자핵이 전자보다 훨씬 무겁고 느리게 움직인다는 차이를 이용해 두 운동을 분리해 계산하는 접근을 정립함. 이후 보른-오펜하이머 근사로 불리며 분자물리학과 양자화학 계산의 기본적인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됨.
오펜하이머, 엔리코 페르미상 수상
오펜하이머가 백악관에서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엔리코 페르미상을 받음. 이론물리학의 연구자·교육자로서의 기여와 로스앨러모스 연구소 및 미국 원자력 프로그램을 이끈 공로가 수상 이유로 제시됨. 1954년 보안 청문회 이후 미국 정부가 그의 공적을 공식적으로 다시 인정한 상징적 사건.
미국 원자력위원회 총괄관리자 K. D. 니컬스가 오펜하이머에게 서한을 보내 과거의 정치적 관계와 보안상 우려를 제기하고 제한자료 접근 자격을 즉시 정지했음을 공식 통보함. 오펜하이머는 사임하지 않고 정식 청문 절차를 요구함.
소련의 첫 원자폭탄 실험 이후 수소폭탄 개발 문제가 제기되자 오펜하이머가 의장을 맡은 미국 원자력위원회 일반자문위원회가 검토 보고서를 제출함. 위원회 다수는 기존 원자폭탄보다 훨씬 큰 파괴력을 가진 ‘Super’의 즉각적인 총력 개발에 반대하며 군사적 이득보다 인류에 대한 위험이 더 크다고 판단함.
오펜하이머가 뉴저지 프린스턴의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 소장에 취임함. 1966년까지 재임하며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기관 운영을 이끎.
오펜하이머가 미국 원자력위원회(AEC) 일반자문위원회 의장을 맡음. 1952년까지 핵연구·핵무기 개발과 원자력 정책에 대한 주요 자문 역할을 수행하며 전시 과학책임자에서 전후 미국 핵정책의 핵심 자문역으로 위치가 바뀜.
딘 애치슨이 이끄는 국무부 원자력위원회 산하 자문단이 「국제 원자력 통제에 관한 보고서」를 완성함. 오펜하이머는 데이비드 릴리엔털 등과 자문단에 참여해 보고서 작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핵물질 채굴과 핵무기 생산 가능 시설을 국제적인 원자력개발기구가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함. 보고서는 같은 달 28일 공식 공개됨.
오펜하이머가 전시 임무가 끝난 뒤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직에서 물러남. 맨해튼 프로젝트의 핵무기 개발 과학책임자 시기를 마무리하고 이후 대학과 정부의 원자력 정책 자문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김.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 직후 오펜하이머가 대표로 서명한 임시위원회 과학패널이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서한을 제출함. 더 강력한 핵무기가 개발될 가능성이 높고 효과적인 군사적 방어책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핵무기 우위만으로 미국의 장기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전쟁 자체를 방지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함.
오펜하이머·엔리코 페르미·아서 콤프턴·어니스트 로런스로 구성된 임시위원회 과학패널이 원자폭탄의 최초 사용 문제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함. 과학자들의 의견이 기술적 시범부터 직접 군사 사용까지 갈렸음을 밝히면서, 전쟁을 종결할 가능성이 있는 순수한 기술 시범을 제시하지 못했고 직접적인 군사 사용에 대한 수용 가능한 대안도 찾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힘.
오펜하이머, 버클리에서 원자폭탄 이론 연구 그룹 조직
오펜하이머가 버클리에 한스 베테, 에드워드 텔러, 로버트 서버 등 이론물리학자들을 모아 핵분열 무기의 가능성과 설계, 임계질량, 폭발 메커니즘 등을 검토하는 연구를 조직함. 연구 결과는 원자폭탄 개발에 필요한 이론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정리했고, 오펜하이머가 이후 중앙 무기연구소를 이끌 후보로 부상하는 계기가 됨.
오펜하이머와 조지 볼코프가 일반 상대성이론과 축퇴 중성자 물질의 상태방정식을 이용해 중성자 핵의 중력평형을 계산한 「On Massive Neutron Cores」를 발표함. 일정 질량을 넘는 경우 정적인 평형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이며 이후 중성자별 최대질량과 중력붕괴 연구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됨.
오펜하이머·필립스, 중수소 핵반응 이론 발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멜바 필립스가 「Note on the Transmutation Function for Deuterons」를 발표함. 중수소핵이 무거운 원자핵과 충돌할 때 중성자가 포획되고 양성자가 방출될 수 있는 핵반응 메커니즘을 분석함. 후대에 이러한 반응이 오펜하이머-필립스 과정으로 불리게 됨.
오펜하이머가 UC 버클리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교수 활동을 시작함. 두 학교를 오가며 연구·교육을 이어가고 젊은 이론물리학자와 대학원생들을 모아, 특히 버클리를 미국 이론물리학의 주요 연구 거점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함.
제니퍼 그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195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오펜하이머 보안 인가 결정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는 장관 명령을 발령함. 에너지부는 당시 절차가 원자력위원회 자체 규정을 위반했고 편향과 불공정의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함. 이는 사망한 오펜하이머에게 보안 인가를 다시 부여한 것이 아니라 1954년 결정 자체를 무효화한 조치임.
오펜하이머가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후두암으로 사망함. 1966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소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연구소 교수로 남아 있었으며 향년 62세.
미국 원자력위원회(AEC)가 4대1 표결로 오펜하이머의 제한자료 접근 인가를 복원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함. 위원회는 불충성이나 기밀 유출 자체를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과거의 관계와 판단·신뢰성 문제를 근거로 접근을 거부함. 그의 AEC 자문계약이 만료되기 직전에 내려진 결정으로, 이후 미국 정부의 핵정책 결정 과정에서 오펜하이머의 공식적 영향력이 사실상 종료됨.
미국 원자력위원회 인사보안위원회가 오펜하이머의 제한자료 접근 자격을 심사하는 비공개 청문회를 개최함. 과거 공산당원·좌파 인사들과의 관계, 슈발리에 사건에서의 진술, 수소폭탄 개발에 대한 입장 등이 집중적으로 다뤄짐. 인사보안위원회는 5월 27일 2대1로 보안 인가를 복원하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오펜하이머가 미국에 불충성했다는 증거는 없고 충성심을 뒷받침하는 상당한 증거가 있다고도 명시함. 2022년 미국 에너지부는 당시 심사 절차에 자체 규정 위반과 불공정이 있었다고 판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