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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수호조약(1882) 이후 종교의 자유를 내다본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회장 명의로 종현 일대 대지를 사들이기 시작함. 조불수호통상조약(1886) 이듬해인 1887년 5월 나머지 부지를 마저 사들여 침계 윤정현의 옛 저택 자리를 확보하고, 그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는 정지작업에 들어감. 매입·건축 비용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지원함.

명동성당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과 가깝고 궁궐을 내려다본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이 성당 부지의 소유권을 억류하고 공사 중단을 요구함. 1888년 4월에는 명동성당 건립을 직접적 계기로 금교령을 선포해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의 전교 활동까지 막음. 프랑스 공사가 부임해 강하게 항의한 끝에 1890년에야 분쟁이 풀려 공사 재개의 길이 열림.

부지 분쟁이 풀린 뒤 옛 저택을 헐고 1892년 5월 8일 새로 부임한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정초식을 올려 본격 착공함. 설계와 공사 감독은 파리외방전교회 코스트 신부가 맡았고, 양옥 기술자가 없어 벽돌공·미장공·목수를 중국에서 데려와 공사를 진행함. 한국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 성당이 첫 삽을 뜬 시점.

명동성당

청일전쟁(1894)으로 중국인 인부들이 돌아가고 재정난까지 겹쳐 공사가 지체되던 중, 설계·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벽체 공사가 끝나갈 무렵인 1896년 2월 선종함. 뒤를 이어 프와넬 신부가 감독을 맡아 내부 공사를 속행함. 설계자의 죽음에도 공사가 멈추지 않고 완공까지 이어진 전환점.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고 성당도 종현성당·종현본당으로 불림. 1945년 광복 후 동 이름이 명동(明洞)으로 바뀌면서 성당 이름도 오늘날의 명동성당(명동본당)으로 자리잡음. 지명 변화가 성당의 통칭으로 굳어진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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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생 이한열, 6월 항쟁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사망. 장례식에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모이며 민주화 열기를 더욱 확산시킴.

국본이 무차별 최루탄 사용에 항의해 6월 18일 '최루탄추방 국민대회'를 전국에서 개최함. 전국 주요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부산에서는 노동자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 6월 24일 사망함. 회사원·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며 학생 시위가 시민 항쟁으로 확산된 분수령.

6월 민주항쟁

6월 10일 국민대회 뒤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감. 인근 계성여고 학생과 시민들이 도시락·물을 전달하며 지원했고, 사제단의 중재로 6월 15일 오후 자진 해산함. 단발성으로 끝날 뻔한 6·10 국민대회를 지속적 항쟁으로 전환시킨 분기점.

민주정의당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같은 날 열린 국본의 6·10 국민대회와 정면으로 대비되며, 정권의 권력 승계 의지를 드러낸 행사. 이후 노태우는 6·29 선언을 거쳐 그해 12월 직선제 대선에서 당선됨.

6월 민주항쟁

박종철군 49재에 맞춰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에서 전개됨. 경찰이 도심 건물 옥상까지 봉쇄했으나 각지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 교도소 양심수들은 단식으로 호응함. 2·7 추도대회와 더불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동력을 다진 행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진 뒤 야당과 재야가 함께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를 열고 추도식과 도심 시위를 벌임. 정부의 원천봉쇄에도 서울·부산 등에서 많은 시민이 추도와 항의에 나섬. 흩어져 있던 반정부 세력이 고문 규탄을 고리로 처음 대규모로 결집한 행동.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후 2시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대성당 마당에서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독교위원회'가 주최한 기념식에 참석해서 한나라당이 6월 항쟁의 의미를 격하하는 것에 대해 발언. "6월항쟁은 국민들이 50년간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온 항쟁이다.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독재를 끊은 이 항쟁 앞에서 어떻게 '잃어버린 10년' 운운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