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9년 11월 아헨 공의회가 필리오케의 신경 삽입을 지지한 뒤, 프랑크 측 사절이 810년 1월 로마에서 교황과 논의함. 레오 3세는 성령의 발출에 관한 서방의 교리적 설명을 인정하면서도 신경 본문을 변경하는 데 반대함. 신학적 설명에 대한 동의와 공통 신경의 문구를 바꿀 권한이 서로 다른 문제였음을 보여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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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3세가 황제 대관식 뒤 다시 알프스를 넘어 카롤루스 대제를 만남. 두 권력의 협력이 대관식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접촉을 통해 이어졌음을 보여 줌. 방문의 세부 목적에 대해서는 전승과 해석에 차이가 있음.
교황 레오 3세, 카롤루스 대제를 로마 황제로 대관
800년 성탄절 로마의 옛 성 베드로 성당에서 레오 3세가 프랑크 왕 카롤루스 대제에게 황제관을 씌움. 서방의 로마 황제 칭호를 되살리고 교황과 프랑크 군주의 협력을 드러낸 사건임. 교황이 군주를 보호자로 필요로 했다는 현실도 배경이었으며, 후대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를 이 날짜 하나로 단순화하기는 어려움.
카롤루스 대제가 로마에 머무르던 중 레오 3세가 자신에게 제기된 혐의를 부인하는 정화 선서를 함. 교황을 누가 심판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 속에서 택한 중세적 분쟁 해결 방식으로, 현대 형사재판의 증거 심리와 동일한 절차는 아님.
파더보른 체류를 마친 레오 3세가 프랑크의 성직자·귀족 사절들과 함께 로마로 돌아옴. 복귀만으로 대립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었으며, 교황에 대한 혐의와 반대 세력의 처리를 둘러싼 논의가 이듬해까지 이어짐.
레오 3세가 799년 7월 하순 파더보른에 도착하여 카롤루스 대제의 영접을 받음. 로마에서의 통치 회복과 교황에게 제기된 혐의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프랑크의 보호가 교황의 복귀를 뒷받침하게 됨.
로마에서 대연도 행렬에 나섰던 레오 3세가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구금됨.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벗어난 뒤 스폴레토를 거쳐 프랑크 왕에게 보호를 구함. 당시 신체 훼손 시도와 회복을 둘러싼 기록에는 기적 전승이 섞여 있어, 이를 그대로 의학적 사실로 확정하기는 어려움.
레오 3세가 잘츠부르크의 아르노에게 대주교의 권위를 나타내는 팔리움을 수여함. 바이에른 지역 교회 조직을 정비하면서 로마 교황청 및 프랑크 왕권과의 연결을 강화한 조치임.
하드리아노 1세의 장례가 치러진 날 레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다음 날 축성됨. 교황청 재무와 성당 사제 업무를 경험한 인물이 로마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프랑크 왕과의 관계를 이어 가게 됨.
당 대종 사망
중국 당나라의 제8대 황제 당 대종. (726년~)
쇼무 천황 사망
제45대 일본의 천황 쇼무 천황. (701년~)
당 덕종 출생
중국 당나라의 제9대 황제 당 덕종. (~805년)
제81대 로마의 교황 교황 베네딕토 2세. (635년~)
교황 도노 사망
제78대 로마의 교황 교황 도노. (610년~)
제67대 로마의 교황 교황 보니파시오 4세. (550년~)
562년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 등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를 공격해 정복함.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에는 신라가 가야 지역을 병합한 사실이 전함.
532년 금관가야의 항복과는 30년의 시간차가 있으므로 가야 전체의 멸망을 한 사건으로 혼동하지 않아야 함. 대가야의 독자적 정치세력이 소멸하고 낙동강 유역 및 영남 내륙의 세력 재편이 진행된 계기.
교황 비질리오 사망
제59대 로마의 교황 교황 비질리오. (?~)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 전사·신라 승리
554년 현재의 충북 옥천 일대 관산성 부근에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짐. 백제 성왕은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한 신라에 맞섰으나 전투 중 신라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백제군이 패배함.
백제와 신라의 외교 협력이 사실상 끝나고 적대관계가 깊어진 사건. 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가 굳어지는 동시에 백제의 국력 회복 계획은 큰 타격을 입음. 전투의 구체적 경로와 참가세력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차이가 존재함.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회복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함. 551년 백제와 신라 등이 고구려를 압박하며 한강 유역에 진출했으나, 이후 동맹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충돌함.
백제는 이를 동맹 위반으로 받아들였고 554년 관산성 전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 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와 중국 방면 외교·교역로 확대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전환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