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생 박종철,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 경찰의 은폐 시도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며 6월 항쟁의 주요 계기 중 하나가 됨.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대한민국 전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민주화 운동으로,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와 대통령 간선제 유지 시도에 맞서 시민들이 직선제 개헌과 민주주의 회복을 요구한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폭로와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이 시민 분노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학생·노동자·종교계·재야 인사뿐 아니라 넥타이 부대로 불린 직장인과 일반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며 전국적 항쟁으로 확산됨.
항쟁의 직접적 배경에는 1987년 4월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가 있었음. 이는 현행 헌법을 유지한 채 정권 이양을 추진하겠다는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던 사회적 열망을 정면으로 거부한 조치였음. 이에 맞서 6월 10일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경찰의 강경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민 참여가 확대되면서 군사정권은 더 이상 기존 방식으로 정국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 몰림.
결과적으로 6월 민주항쟁은 1987년 6월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을 이끌어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제도적 민주화의 출발점이 됨. 이후 노동자 대투쟁, 시민사회 성장, 인권 의식 확대, 선거정치의 재편으로 이어지며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를 크게 바꾸었음. 따라서 6월 민주항쟁은 단일한 시위 사건이라기보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시민이 정치의 주체로 등장한 결정적 전환점이자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 기원으로 이해할 수 있음.
추가 정보
배경
1985년 2·12 총선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지던 가운데,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함. 정부는 이를 단순 쇼크사로 은폐하려 했으나 언론 보도와 검안으로 고문 사실이 드러나며 국민적 공분이 일어남. 4월 13일 전두환이 일체의 개헌 논의를 중단시키는 호헌조치를 발표하면서 저항이 본격화됨.
전개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 사건의 축소·은폐·조작을 폭로하고, 5월 27일 야당·재야·종교계가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함.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피격되어 혼수상태에 빠지자 분노가 절정에 이름. 6월 10일 국본 주최의 국민대회를 시작으로 명동성당 농성, 6·18 최루탄추방대회, 6·26 국민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며 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됨.
결과
경찰력으로 시위를 막을 수 없고 군 투입도 부담스러웠던 정권은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발표함. 이어 제9차 개헌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했으며, 6월 항쟁은 시민의 힘으로 권위주의 정권을 물러서게 하고 민주주의를 진전시킨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평가됨.
타임라인
16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진 뒤 야당과 재야가 함께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를 열고 추도식과 도심 시위를 벌임. 정부의 원천봉쇄에도 서울·부산 등에서 많은 시민이 추도와 항의에 나섬. 흩어져 있던 반정부 세력이 고문 규탄을 고리로 처음 대규모로 결집한 행동.
박종철군 49재에 맞춰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에서 전개됨. 경찰이 도심 건물 옥상까지 봉쇄했으나 각지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 교도소 양심수들은 단식으로 호응함. 2·7 추도대회와 더불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동력을 다진 행진.
전두환이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가 열린 4월 13일 특별담화를 통해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현행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함.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이 조치는 '4·13 호헌조치'로 불림. 발표 당일부터 각계각층의 반대 투쟁이 터져 나와 6월 항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됨.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
4·13 호헌조치 철폐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목표로, 야당 정치인과 재야·종교계·학생운동권 인사 2200여 명이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를 결성함. 국본은 호헌조치를 무효로 선언하고 각종 악법의 개정과 민주화를 위한 범국민 운동을 결의함. 전국 조직망을 갖춘 국본은 6·10 국민대회 등 6월 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끈 통일 지도부가 됨.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던 이한열은 교문 앞에서 독재 타도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가두시위를 하던 중 전투경찰이 쏜 SY-44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짐. 당시 그가 피를 흘리며 동료 학생(박남식 씨 등)에게 부축되어 쓰러지는 장면은 외신기자(정태원 씨)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 세계에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알림. 이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며 6월 민주 항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됨.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6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함. 경찰의 원천봉쇄로 대회장에는 소수만 참여했으나, 오후 6시를 기해 차량 경적과 흰 손수건 흔들기 등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이 동참함. 6월 항쟁의 본격적 시작을 알린 날로, 이날 밤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짐.
민주정의당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같은 날 열린 국본의 6·10 국민대회와 정면으로 대비되며, 정권의 권력 승계 의지를 드러낸 행사. 이후 노태우는 6·29 선언을 거쳐 그해 12월 직선제 대선에서 당선됨.
6월 10일 국민대회 뒤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감. 인근 계성여고 학생과 시민들이 도시락·물을 전달하며 지원했고, 사제단의 중재로 6월 15일 오후 자진 해산함. 단발성으로 끝날 뻔한 6·10 국민대회를 지속적 항쟁으로 전환시킨 분기점.
국본이 무차별 최루탄 사용에 항의해 6월 18일 '최루탄추방 국민대회'를 전국에서 개최함. 전국 주요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부산에서는 노동자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 6월 24일 사망함. 회사원·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며 학생 시위가 시민 항쟁으로 확산된 분수령.
국본이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전국 37~38개 시·군에서 동시에 벌임.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6월 항쟁 최대 규모의 시위로, 대도시뿐 아니라 군 단위 농촌까지 시위가 번짐.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함이 분명해지며 정권을 6·29 선언으로 내몬 결정적 항쟁.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1987년 6월 29일 시국수습을 위한 8개 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함. 여야 합의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새 헌법에 따른 대선 실시, 공정 경쟁을 위한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기본권 강화, 언론 자유 보장, 지방·교육 자치, 정당 활동 보장 등을 제시함. 전두환의 재가 아래 6월항쟁의 핵심 요구를 사실상 수용한 조치로, 5공화국 권위주의 체제의 후퇴와 민주화 이행을 결정지은 분기점.
연세대생 이한열, 6월 항쟁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사망. 장례식에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모이며 민주화 열기를 더욱 확산시킴.
7월 5일 끝내 숨진 이한열의 장례가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짐. 연세대 영결식에 이어 서울시청 앞 노제에 100만 명이 모였고, 운구 행렬은 광주 망월묘지공원 안장으로 이어짐. 6월 항쟁의 희생을 상징하는 추모 물결 속에 약 한 달간의 항쟁이 마무리된 날.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에 의해 ‘6.10 민주항쟁기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제정
그 외 사실들
기록
6월 항쟁에 참가한 연인원은 약 400~500만 명으로 추산됨. 6·10 국민대회 이후 약 20일간 전국에서 매일 평균 100회 이상의 시위가 동시다발로 벌어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