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1910–1911년의 기록 48건

구간을 선택해 더 좁은 기간으로 좁혀 보세요.

가장 많은 기록
1911 · 25건
관련 엔티티
37개
날짜가 확정된 기록
71%
구간을 선택해 기록 보기 1911 · 25건

2월호 표지에 참나무 잎 장식과 노란 테두리를 적용함. 이후 세부 장식과 서체는 달라졌지만, 노란 테두리는 잡지를 알아보게 하는 대표적인 시각 요소로 이어짐. 사진뿐 아니라 표지의 일관된 디자인도 잡지의 정체성을 형성했음을 보여 줌.

운동 중단 뒤 남은 의연금의 처리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1909년 조직된 국채보상금처리회가 1910년 4월 18일 국민대총회를 개최함. 참가자들은 토지를 매입하고 그 수익을 교육비로 사용하기로 결의함. 국채 상환이라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워진 상황에서 국민이 모은 자금을 교육구국사업으로 전환하려 한 시도였으나, 같은 해 병합으로 실행되지 못함.

이승만이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미국에서 이어 온 학업을 통해 국제법과 외교사를 연구했음.

1910년 6월 14일, 이승만이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음. 프린스턴 대학기록실이 공개한 학적카드에는 학위 수여일이 이날로 적혀 있음. 그는 조지워싱턴대학교 학부를 마친 뒤 하버드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1908년 가을 프린스턴에 입학했음.

그의 박사논문은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었음. 국제법과 외교사를 공부한 학업은 이후 미국 정부와 국제회의를 상대로 펼친 독립 외교의 지적 배경이 됨. 논문 출판은 학위 취득과 별개로 진행되어 1912년에 이루어짐. 프린스턴 기록실은 당시 이승만이 출판 비용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관련 서신으로 설명함.

대한제국의 경찰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한다는 각서를 체결한 사건. 일본의 통감부가 치안과 강제력에 대한 지배를 강화하고 한국 경찰 조직을 일본의 헌병경찰 체제에 편입시키는 근거. 1909년 사법권 위탁에 이어 병합 직전까지 진행된 주권 박탈의 단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서명한 강제 병합 조약을 8월 29일 공포한 사건.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조약을 강요하고 공포함으로써 대한제국의 국가 체제가 소멸하고 일제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경술국치. 조약 서명일과 공포일을 구별해야 하는 사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자, 일제가 태극기의 공식 사용을 금지하고 일장기를 강요함. 공적 영역에서 사라진 태극기는 도리어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깃발로 되살아나는 계기가 됨.

통감부가 1909년 발행인 어니스트 베델의 사망 뒤 대한매일신보 매수를 추진하고, 1910년 5월 신문을 장악함. 한일병합조약 공포 다음 날인 1910년 8월 30일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을 떼고 제호를 매일신보로 변경. 한말 항일 민족지가 조선총독부의 한국어 기관지로 전환된 상징적 사건.

매일신보

종로와 남대문을 잇는 전차노선이 복선화되면서 광통교 위에 콘크리트를 덮고 선로를 설치한 공사. 기존 석교를 교통시설 확장의 바탕으로 사용하면서 다리 본체가 도로 아래로 가려지고, 주변의 도시 공간도 전차와 근대 상업시설을 중심으로 재편됨. 1958년 하천 복개에 앞서 광통교의 원래 모습이 크게 변형된 전환점.

1910년 10월 5일 리스본에서 공화국이 선포되며 포르투갈 왕정이 무너지고 제1공화국이 출범함.

10월 4일 시작된 공화파 봉기는 리스본에서 왕정 세력을 무너뜨렸고, 다음 날 아침 리스본 시청 발코니에서 공화국이 공식 선포됨. 이 사건은 포르투갈 군주제의 종말과 제1공화국 출범을 알린 체제 전환으로, 이후 1911년 공화헌법 제정과 1926년 군사 쿠데타까지 이어지는 정치사의 출발점.

여성 참정권 입법이 진전되지 않는 가운데 의회에 접근하려던 여성 시위대가 경찰 및 반대 군중과 충돌함. 참가자들은 폭행과 성적 모욕을 포함한 부당한 대우를 호소했으며, 이날은 ‘블랙 프라이데이’로 기억됨. 국가가 여성의 정치적 요구에 대응하는 방식에 대한 분노를 키운 사건이었음.

1910년 12월 15일자 《매일신보》는 교육기본금관리회가 관리하던 국채보상금 9만여 원이 12월 12일 총감부에 납입되고, 국채보상금총합소 관계자들이 관리하던 4만 2,000원이 12월 14일부터 경무총감부 보관으로 이전되었다고 보도함. 교육사업에 사용하려던 계획이 무산되고, 국민이 모은 의연금이 일제 통치기구의 관리 아래 들어간 국채보상운동의 사실상 마지막 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