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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의 기록 68건

75년 전.한 해의 기록을 월별로 살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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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유리한 종결을 기다리지 않고 대일 강화 작업을 계속하는 방침을 승인한 사건. 존 포스터 덜레스가 대통령의 특별대표 자격으로 협상을 이끌도록 하는 조치와 결합. 한국전쟁의 전황과 강화 추진을 분리하면서 일본의 주권 회복과 미국 중심 안보 질서 편입을 앞당기는 전환점.

산레모의 카지노에서 첫 음악제가 시작됨. 닐라 피치와 아킬레 톨리아니, 파사노 듀오가 20곡을 나누어 불렀으며,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에게 전달되었음. 오늘날처럼 많은 가수가 각자의 신곡을 들고 출전하는 대형 텔레비전 행사가 아니라, 소수의 가창자가 여러 작품을 소개하는 경연으로 출발했음. 닐라 피치의 ‘Grazie dei fiori’가 첫 우승곡이 되었음.

산레모 음악제

국군이 거창군 신원면의 어린이·노인·여성 등을 포함한 주민 수백 명을 집단살해함. 이승만 정부는 현장조사를 방해하고 학살을 군법회의에 따른 적법한 처형으로 설명하는 허위 발표를 내놓았음.

1951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국군 제11사단 9연대 3대대가 경남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민간인들을 집단살해함. 후방의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모아 총살했으며, 어린이·노인·여성도 희생됨.

신중목 의원이 3월 29일 국회에서 사건을 폭로하자 합동조사단이 구성되었음. 그러나 신성모 국방장관과 군 관계자들은 현장을 은폐하고 국군을 공비로 위장시켜 총격을 가하게 하는 방법으로 조사를 방해했음. 4월 24일 공보처는 어린이·노인·여성 등을 제외한 남자 187명을 군법회의에서 유죄로 판단하여 개별 처형했다는 허위 공식설명을 발표함. 이는 무고한 민간인의 집단살해를 합법적인 사형집행으로 꾸민 은폐였음.

이승만은 4월 30일 대통령 지시문에서 군인의 다수 생명 희생과 사건의 해외 파장을 인식하면서 관련 지휘관들을 징벌하도록 했음. 그러나 적법한 처형이었다고 하더라도 정부 체통을 위해 처벌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논란을 초래한 데 대해 다소간 벌을 주라고 지시함. 공보처의 허위발표와 군 관계자들의 조사방해는 확인되지만, 이승만이 구체적인 위장공비 작전이나 허위 증거 작성을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확인된 것은 아님.

1951년 12월 16일 군법회의는 관련 지휘관의 위법한 명령과 살해 책임을 인정하여 유죄판결을 내렸음. 당초 정부가 설명한 적법한 처형이 아니라 위법한 명령과 집단살해였음이 같은 해 재판에서도 드러났음.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정상적인 대학 운영이 어려워지자 부산에서 전시연합대학의 연합강의 방식으로 수업을 이어감. 전쟁 중 교육이 끊기지 않도록 여러 대학의 인력과 시설을 공동으로 활용한 운영 방식.

서울대는 피난지에 단과대학별 임시 교사를 마련했으며, 1952년 전시연합대학 체제가 해체된 뒤에도 부산에서 독자적으로 강의를 계속함.

미국 재무부와 연방준비제도가 정부 부채 관리와 통화정책 운용을 둘러싼 갈등 끝에 재무부–연방준비제도 협정(Treasury–Federal Reserve Accord)을 발표함.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이어진 국채금리 억제 정책에서 벗어나 연준이 경제 상황에 따라 통화정책을 운용할 수 있는 기반을 강화함. 정부 부채 관리와 통화정책을 분리하고 현대 연준의 독립성을 형성한 주요 전환점.

미국이 전쟁상태 종결과 일본의 주권 회복을 중심으로 한 잠정 조약안을 영국에 제시한 단계. 한국에 대한 일본의 권리 포기는 담았으나 한국의 개별 섬 이름은 열거하지 않은 문안. 다른 관계국에도 의견을 요청하면서 미국안과 영국안의 차이를 조정하는 본격 협상의 기초 마련.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덜레스와의 회담에서 한국의 강화조약 서명국 참여에 반대하는 일본 정부의 의견을 전달한 사건. 일본은 한국이 해방된 지역이지 교전국이 아니라는 논리와 재일한국인에게 연합국 국민의 재산·보상 권리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를 제시. 당시 덜레스는 한국 정부의 국제적 위신을 고려해 참여 가능성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후 미국의 입장도 배제 쪽으로 변화.

이승만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무·법무·국방부 장관에게 사임을 요구함. 당시 법무부장관 김준연의 증언에 따르면 조병옥은 김준연과 함께 즉석에서 사임 의사를 밝힘.

미군 의무단이 한국의 포로수용소에서 관찰한 몸니의 DDT 저항성을 미8군에 보고. 저항성은 예전에는 효과가 있던 살충제에도 곤충이 살아남는 성질을 뜻하며, 보고 후 포로에 대한 DDT 살포를 잠정 중단. 현장 관찰과 실험을 연결한 살충제 저항성 연구의 중요한 계기.

오마 브래들리 합참의장이 상원 군사위원장 리처드 러셀에게 웨이크섬 회담 발언 요지의 작성 경위를 설명하는 서한을 보내 기록을 제출함. 이 기록은 워싱턴 측 참석자들의 필기와 제섭의 비서 버니스 앤더슨의 속기 메모 등을 귀환길에 모아 정리한 문서였으며, 브래들리는 1950년 10월 19일 맥아더에게 사본 다섯 부를 보냈다고 설명함.

맥아더 해임 뒤 회담의 판단과 발언을 따지는 과정에서 기록이 상원 자료로 공개됨. 완전한 녹취록이 아니라 발언 요지를 모은 기록이라는 성격을 이해해야 하며, 두 사람의 단독 대화 전체를 복원할 수 있는 문서도 아님. 앤더슨은 훗날 구술 인터뷰에서 자신이 몰래 숨어 기록했다는 맥아더 측 주장에 반박하며 작성 과정을 설명함.

미국과 영국이 서로 다른 초안을 조정하여 공동 조약안을 마련한 단계. 한국 관련 조항에 제주도·거문도·울릉도를 포함한 일본의 권리 포기를 적었으나 독도는 명시하지 않은 문안. 한국의 서명국 참여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중국 대표권과 일부 재산 문제도 추가 협상이 필요한 과제로 존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