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명세 (1893년)
인물

이명세 (1893년)

Lee Myung-se

자는 성도(聖道), 호는 의산(義山), 창씨한 이름은 춘산명세(春山明世). 본관은 전의(全義). 본적은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 성북구(城北區) 동소문동(東小門洞). 일제강점기의 유학자 겸 기업인으로, 조선총독부가 유교계를 식민통치와 전시동원 체제에 편입시키는 과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인물임. 조선유도연합회 상임참사와 상임이사를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에는 조선총독부 직속 기구였던 경학원의 사성으로 임명됨.

그의 행적은 단순한 직업 활동보다 일제 말기 황민화 정책과 침략전쟁 협력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활동으로 평가됨. 특히 일본 천황 중심의 국가관과 유교를 결합한 ‘황도유학’을 주장하고, 태평양전쟁과 징병제 실시를 유교적 명분으로 정당화한 점이 주요 친일 행위로 지적됨.

해방 이후 이명세의 행적은 친일 청산 논쟁 속에서 반복적으로 거론되었고,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됨. 이명세의 사례는 일제 말기 유교계가 어떻게 식민 권력의 통치 이념과 전시동원 체제에 편입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다뤄질 수 있음.

12 타임라인
3 사실

타임라인

12
1893 1건
133년 전
1918 1건
108년 전
1923 1건
103년 전
1932 1건
94년 전

호서은행이 한일은행에 합병된 뒤 1932년 9월 동일은행(東一銀行) 검사역으로 임명됨. 이어 주식회사 남창사·철원창고·이문당 이사와 동문사 이사 겸 사장(1940), 재단법인 학린사 상임이사 등 여러 기업·법인의 임원을 두루 맡으며 금융·실업계 인사로 활동함. 법조 서기에서 출발해 은행원을 거쳐 기업가로 자리잡은 그의 경력이 정점에 이른 시기.

1939 1건
87년 전
1941 2건
85년 전
1942 1건
84년 전

1942년 일제의 조선 징병제 시행을 찬양하는 한시와 글을 발표하고 각지를 돌며 강연 활동을 벌임. 조선 청년의 전쟁 동원을 유교적 명분으로 정당화한 적극적 친일 행각.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포함의 핵심 근거가 된 행위.

1944 1건
82년 전
1957 1건
69년 전

1957년 7월 이승만 정권과 결탁한 이른바 '재단파'가 성균관대학교를 세운 독립운동가 김창숙을 유도회와 성균관대에서 폭력으로 몰아낸 뒤, 이명세가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장 자리에 오름(총장은 이선근). 일제에 협력한 친일 유림이 해방 뒤에도 단죄되기는커녕 독재정권의 비호 아래 유림계 실권을 장악한 대표적 사례로 비판됨.

2009 1건
17년 전

2009년 11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이명박 대통령과 국회에 보고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이명세가 포함됨. 앞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종교 부문에도 수록된 바 있음. 그의 친일 행적이 국가 차원에서 공식 규명·기록된 결과.

그 외 사실들

기록

  • 자(字)는 성도(聖道), 호(號)는 의산(義山). 본관은 전의 이씨이며 원적지는 경성부 성북구 동소문동.

    출처: 위키백과
  • 일제강점기에 일본식 이름 하루야마 메이세(春山明世)로 창씨개명함.

    출처: 위키백과

트리비아

  • 손녀는 역사학자이자 전 주러시아 대사·KBS 이사장을 지낸 이인호로, 할아버지 이명세를 높이 평가한 바 있음.

    출처: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