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출생함. 일부 의학사 자료와 인물사전에서는 1872년생으로 기록되어 출생연도에 이견이 있음.
안상호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전반에 활동한 의사. 관립일어학교를 거쳐 일본 도쿄자혜의원의학교에서 서양의학을 공부하고 일본 의사 개업 자격을 취득했으며, 1907년 귀국한 뒤 서울 종로에서 개인 진료소를 운영함. 대한제국 황실과 이왕직의 촉탁의·전의로도 활동했고, 1908년 한국인 의사들이 조직한 의사연구회의 부회장을 맡음.
한편 일제의 식민 통치가 본격화된 뒤에는 이토 히로부미 국민대추도회 준비위원, 관선 경성부협의회원, 경성신사 씨자총대, 내선융화단체 대정친목회 평의원, 경성 종로금융조합 조합장, 동민회 회원·평의원 등을 지냄. 191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는 자신의 가정이 ‘일선동체’와 ‘내지화’의 모범 사례로 소개되는 데 호응함.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러한 행적을 친일·부일 협력으로 평가하지만, 안상호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는 등재되지 않음.
기본 정보
타임라인
17관립일어학교를 졸업하고 대한제국 정부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자혜의원의학교에서 서양의학 수학을 시작함.
도쿄자혜의원의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의 의사 개업 자격을 취득함. 한국인 가운데 이 자격을 처음 취득한 사례로 평가됨.
일본에서 귀국한 뒤 서울 종로에 서양식 개인 진료소를 열고 개업의로 활동하기 시작함. 한국인 초기 근대 개업의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됨.
한국인 의사들이 조직한 의사연구회가 창립되고 김익남이 회장, 안상호가 부회장으로 선출됨. 한국인 의사 조직 형성의 초기 사례로 평가됨.
안중근에게 피살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민간에서 추진된 국민대추도회(대한국민추도회)의 준비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림. 실제 추도회는 열리지 않았으나,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참여를 안상호의 친일 행적 가운데 하나로 평가함.
1910년 8월부터 1926년 9월까지 시종원 전의, 이왕직 전의 및 촉탁의로 황실 진료에 참여함. 고종과 순종이 위독한 시기에도 의료진으로 진료에 관여함.
일제가 한국 병합을 기념해 수여한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음.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 관련 행적에 포함됨.
경성부윤의 자문기구이자 일제 식민통치의 지방행정 보조기구였던 경성부협의회의 관선 협의회원으로 1914년, 1918년, 1920년 세 차례 임명됨.
일제 식민통치기의 신사였던 경성신사에서 신도 대표에 해당하는 씨자총대로 활동함. 민족문제연구소는 이를 내선융화·친일 협력 관련 행적으로 분류함.
내선인 융화와 관민 교정, 식산흥업 장려를 표방한 대정친목회 창립 간부진에서 평의원으로 이름을 올림. 민족문제연구소는 무단통치기에 결성된 이 단체의 성격과 안상호의 평의원 참여를 근거로 명백한 친일 행위로 평가함.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안상호의 일본인 배우자와 자녀들을 소개하며 그의 가정을 ‘일선동체’와 ‘내지화’의 성공 사례로 선전함. 기사에서 안상호는 자신을 일본 사람과 같다고 표현하고 조선식 생활과 조선인 사회에서 거리를 두고 있다고 밝힘.
1922년부터 1927년까지 경성 종로금융조합 조합장을 지냄. 민족문제연구소는 이 금융조합을 식민지 금융수탈기구로 규정하고 안상호의 조합장 경력을 식민통치 협력 행적에 포함함.
반일운동 배척과 내선융화를 표방한 동민회 회원으로 참여하고, 1925년부터 1927년까지 평의원을 역임함. 민족문제연구소가 안상호의 주요 친일·부일 협력 행적으로 제시함.
서울에서 사망함. 1928년 1월 《매일신보》는 그의 부고에서 ‘내선가정의 성공자’라는 점을 강조해 소개함.
정구충이 《한국 의학의 개척자》에서 의친왕에게 안상호가 고종 독살 의혹을 받게 된 경위를 물었고, 의친왕이 이를 당시 민중의 오해와 망국의 울분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했다고 기록함. 사건 당시 기록이 아니라 후대에 정리된 전언으로, 안상호의 독살 가담설을 부인하는 기록이라는 성격임.
군포시가 경기대학교 전통문화콘텐츠연구소에 의뢰해 제작한 《군포시 지명유래 및 씨족역사》가 안상호의 왕실 진료 경력과 함께 고종 사망 당시 독살 가담 의혹을 기록함. 자료는 관련 자료 부족을 이유로 진위 판단을 유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