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소속 오페라·발레·합창단, 재단법인으로 독립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이 각각 재단법인으로 독립함. 세 단체의 공연 활동이 종료된 것이 아니라 국립극장 전속단체에서 별도 법인 운영으로 바뀐 것임. 이후에도 공연장 이용과 공동 기획 등을 통해 국립극장과 협력할 수 있는 관계가 유지됨.
편집일 기준 · 한국 시간
국립오페라단·국립발레단·국립합창단이 각각 재단법인으로 독립함. 세 단체의 공연 활동이 종료된 것이 아니라 국립극장 전속단체에서 별도 법인 운영으로 바뀐 것임. 이후에도 공연장 이용과 공동 기획 등을 통해 국립극장과 협력할 수 있는 관계가 유지됨.
해오름극장이 무대·객석·로비를 전면 개보수한 뒤 공식 재개관함. 자연음과 증폭음을 모두 고려한 음향 환경, 무대 장치와 관객 동선을 개선함. 기존의 전면 돌계단 중심 출입 방식도 바뀌어 접근성을 높였으며, 시범 운영을 거쳐 정식 공연장으로 돌아옴.
달오름극장이 개보수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엶. 대극장과 구별되는 중규모 공연 공간을 정비하여 창극·무용·연극 등 다양한 작품을 수용할 기반을 개선함. 국립극장의 제작·관람 환경을 단계적으로 바꾸는 과정의 일부였음.
전쟁 중 대구의 문화극장을 국립극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함. 서울의 기존 공연장을 사용할 수 없던 시기에 피난지에서 기관의 기능을 이어 간 전환점임. 이후 서울로 복귀할 때까지 대구에서 공연 활동을 지속함.
국립창극단·국립무용단·국립오페라단이 창단됨. 연극 중심으로 출발한 국립극장이 여러 공연예술 분야의 제작 기반을 갖추는 계기가 됨. 창극과 한국 춤을 비롯한 전속단체의 활동은 이후 국립극장의 성격을 형성하는 중요한 축이 됨.
경기도 파주에 무대장치·소품·의상을 보관하고 다시 활용하는 무대예술지원센터가 개관함. 물품을 전산화하고 세탁·수선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어 공연마다 새로 제작하고 폐기하는 부담을 줄이려 함. 전시와 체험 공간을 함께 마련해 무대 뒤의 작업을 시민에게 보여 주는 기능도 더함.
국립극장에 책임운영기관 제도가 시행됨. 공공기관이라는 성격을 유지하면서 기관 운영의 자율성과 성과 책임을 결합하는 체제로 전환함. 공연 제작의 예술적 목표와 공공서비스의 성과를 함께 관리하는 운영 틀의 변화였음.
2022-2023 레퍼토리시즌에 음악극 《합★체》와 연극 《틴에이지 딕》 등 장벽 없는 극장 만들기 프로그램을 편성함. 장애인 관객의 접근을 돕는 데서 더 나아가 장애와 사회적 시선을 작품 안에서 다루려는 시도였음. 이 날짜는 해당 시즌의 개막일이며, 무장애 사업 자체가 처음 시작된 날을 뜻하지 않음.
에로스 라마조티가 ‘Terra promessa’로 산레모 음악제 신인 부문에서 우승함. 기성 가수들의 경연과 함께 젊은 음악가를 소개하는 무대가 경력을 여는 통로로 기능한 대표적인 사례였음. 그는 이후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이탈리아 대중음악 가수로 성장했음.
음악제를 취재하는 기자들이 별도의 비평가상을 만들었으며, 미아 마르티니의 ‘E non finisce mica il cielo’가 첫 수상곡이 되었음. 공식 경연 순위와 구분되는 평가 창구가 생겨 대중적 인기뿐 아니라 작품성과 해석을 따로 조명할 수 있게 되었음. 이 상은 1996년부터 미아 마르티니의 이름을 붙여 수여됨.
산레모의 카지노에서 첫 음악제가 시작됨. 닐라 피치와 아킬레 톨리아니, 파사노 듀오가 20곡을 나누어 불렀으며, 노래는 라디오를 통해 청취자에게 전달되었음. 오늘날처럼 많은 가수가 각자의 신곡을 들고 출전하는 대형 텔레비전 행사가 아니라, 소수의 가창자가 여러 작품을 소개하는 경연으로 출발했음. 닐라 피치의 ‘Grazie dei fiori’가 첫 우승곡이 되었음.
RAI가 음악제의 세 저녁 공연을 모두 텔레비전으로 중계하면서 결선만 방송하던 축소기에서 벗어남. 알리체가 ‘Per Elisa’로 우승한 이 대회는 음악제가 다시 주요 방송 행사로 성장하는 흐름을 보여 주었음. 노래 경연의 회복과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으로서의 확대가 함께 이루어졌음.
산레모 음악제의 무대가 카지노에서 아리스톤 극장으로 옮겨졌으며, 컬러 텔레비전 시대에 맞는 공연 연출이 시작됨. 객석과 무대의 조건이 바뀌면서 조명과 세트, 출연자의 시각적 표현이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되었음. 이후 아리스톤은 음악제를 상징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음.
산레모시가 직접 조직한 대회에서 주요 음반업계의 참여가 약해지고 텔레비전 중계도 결선 중심으로 축소됨. 음악제 밖에서 성장한 싱어송라이터와 새로운 음악 흐름에 비해 산레모의 영향력이 약해졌던 시기를 보여 줌. 음악제의 역사는 계속된 성공만이 아니라 관객과 음악산업의 관심을 다시 얻기 위한 변화의 과정이기도 했음.
산레모 음악제에 참가한 가수 루이지 텐코가 대회 기간 중 사망함.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지만 경연은 계속되었으며, 이 결정은 음악제와 방송 오락산업이 예술가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남겼음. 그의 죽음을 단순히 한 번의 경연 결과로 설명하기보다는 한 예술가의 삶과 당시 음악산업의 환경을 구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음.
열여섯 살의 질리올라 칭케티가 ‘Non ho l’età’로 산레모 음악제에서 우승함. 이 노래는 같은 해 유로비전에서도 이탈리아에 첫 우승을 안겨 주었음. 청소년 가수의 등장이 주목받던 시기에 산레모의 신인 발굴과 국제 노래 경연 사이의 연결을 선명하게 보여 준 사례였음. 이 해부터 이탈리아 가수와 외국 가수가 같은 노래를 각각 부르는 짝을 이루어 출전하여, 한 작품을 서로 다른 목소리로 듣는 형식도 확대되었음.
도메니코 모두뇨의 ‘Nel blu dipinto di blu’가 제1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레코드와 올해의 노래 부문을 수상함. 1958년 산레모 음악제의 우승곡이 이듬해 미국 음악계의 주요 상으로 이어진 사례였음. 산레모에서 소개된 이탈리아어 노래가 국내 경연의 범위를 넘어 국제적인 청중에게 도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음.
도메니코 모두뇨가 자신이 공동 작곡한 ‘Nel blu dipinto di blu’로 산레모 음악제에서 우승함. 이 곡은 후렴의 ‘Volare’라는 말로도 널리 알려졌으며, 모두뇨가 팔을 펼치며 노래하는 모습은 음악제의 대표적인 장면이 되었음. 작곡에 참여한 가수가 직접 노래를 해석하는 방식과 새로운 대중음악의 활력이 전통적인 가창 중심 무대에 들어온 전환점이었음.
제5회 산레모 음악제가 텔레비전으로 방송되기 시작함. 라디오로 노래를 듣던 청중에게 가수의 표정과 몸짓, 무대의 모습을 함께 보여 주게 되면서 음악제의 표현 방식이 넓어졌음. RAI의 방송망은 지역에서 열리는 경연을 전국의 가정이 함께 시청하는 행사로 발전시키는 기반이 되었음.
카를로 콘티가 진행한 제76회 산레모 음악제에서 살 다빈치의 ‘Per sempre sì’가 우승곡으로 발표됨. 사이프가 2위, 디토넬라피아가가 3위를 차지했음. 1951년 라디오 경연으로 시작된 행사가 76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며, 여러 세대의 가수와 서로 다른 음악적 취향이 만나는 방송 무대로 존속하고 있음을 보여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