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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의 외교 활동을 마친 김규식이 미국 워싱턴에 도착해 구미위원부 초대 위원장으로 활동. 미국 정부와 정치인들을 상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하고,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독립공채 자금을 모집해 임시정부에 전달.

김규식 (우사)

대한민국 정부가 제70주년 3·1절을 맞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최고 등급인 대한민국장을 추서. 조소앙·안재홍 등과 함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독립운동가들을 포상한 조치의 하나로, 파리강화회의 독립 외교와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등의 공적을 국가적으로 기림.

6·25전쟁이 발발한 뒤 피란하지 않고 서울에 남아 있던 김규식, 1950년 9월 조선인민군에 의해 납북. 북쪽으로 이동하던 중 지병이 악화되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인근 별오동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해짐.

김구와 김규식,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당·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상황에서 외세 의존을 배제하고 남북협상을 통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계속 추진한다는 방침을 표방. 남북협상의 성과와 합의를 이어가기 위한 정치적 연대기구로 활동함.

김규식 (우사) 공동 결성 지도자

김규식, 남북협상을 마치고 귀환한 뒤 5·10 총선거에 대해 반대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불반대·불참가’ 입장을 표명.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선거를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노선과는 거리를 둠. 이후 제도권 정부 수립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김구와 함께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계속함.

김규식 (우사)

김규식, 1948년 4월 21일 원세훈 등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이동.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전체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김구·김일성·김두봉과 남북 지도자 회담을 진행하며 남북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협의함.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 철수, 철수 이후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내전 방지 등에 합의했으나 이를 실행할 제도적 수단을 마련하지 못함.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으며, 남북협상은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분단에 반대한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통일정부 수립 시도로 남음.

김규식 (우사)

중도 좌·우파 정당과 사회단체·개인들이 참여한 민족자주연맹, 1947년 12월 20일 서울 천도교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추대.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 독재를 모두 배제하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결합한 중도 노선을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지도자 회담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며 이듬해 남북협상의 정치적 기반으로 기능함.

김규식 (우사) 초대 위원장

김규식·원세훈·안재홍·홍명희 등 중도파 인사들, 1947년 10월 민족자주연맹 결성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선출. 좌우합작위원회와 미소공동위원회 대책협의회 등 기존 중도파 조직을 통합해 극좌·극우의 대립을 넘어서는 독자적인 정치세력 결성을 추진함.

date: 1947-12-20 title: 민족자주연맹 발족하고 김규식 위원장 취임 type: start entities:

중도 좌·우파 정당과 사회단체·개인들이 참여한 민족자주연맹, 1947년 12월 20일 서울 천도교강당에서 결성대회를 열고 김규식을 위원장으로 추대. 독점자본주의와 무산계급 독재를 모두 배제하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결합한 중도 노선을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 지도자 회담과 통일정부 수립을 추진하며 이듬해 남북협상의 정치적 기반으로 기능함.

김규식 (우사)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정식 개원을 하루 앞두고 열린 예비회의에서 참석 의원 53명 중 49명의 찬성으로 김규식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 이튿날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57명의 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함. 김규식은 좌우합작운동을 제도 정치로 연결하고 통일 임시정부 수립을 준비하려 했으나, 입법의원이 제정한 법령은 미군정 장관의 동의를 받아야 효력이 발생하는 제약을 지님.

김규식 (우사)

김규식과 여운형, 1946년 5월부터 좌우 정치세력의 합작을 위한 회담을 진행한 끝에 7월 25일 좌우합작위원회를 발족. 김규식은 우측 주석, 여운형은 좌측 주석을 맡아 중도 우파와 중도 좌파를 각각 대표함. 좌우합작을 바탕으로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휴회 중이던 미소공동위원회를 재개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함.

김규식 (우사)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1945년 11월 23일 김구·이시영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 제1진으로 김포비행장에 도착. 미군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입국함. 김규식은 1913년 중국으로 망명한 지 약 32년 만에 귀국해 국내 정치 활동과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나섬.

대한민국 임시정부, 1944년 4월 임시헌장을 개정해 부주석제를 신설하고 국무위원을 증원한 뒤 조선민족혁명당 주석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선출. 김규식은 4월 26일 김구 주석과 함께 취임 선서를 함. 한국독립당을 대표한 김구와 조선민족혁명당을 대표한 김규식을 중심으로 좌우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하는 통일전선 내각을 구성함.

김규식 (우사)
1943-02-22 김규식을 주석으로 선출한 정당

조선민족혁명당, 김규식을 주석으로 선출

조선민족혁명당, 제7차 전당대표대회에서 김규식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하고 김원봉을 총서기에 재선임. 임시정부에 참여한 조선민족혁명당을 김규식이 정치적으로 대표하고 김원봉이 당의 실무와 조직을 이끄는 지도체제를 구성.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 연합국의 승전에 대비한다는 노선을 확립함.

김규식 (우사)

김규식, 1935년 7월 5일 난징에서 한국독립당·의열단·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미주대한인독립당 대표들이 결성한 민족혁명당에 창당 주역으로 참여. 제1차 중앙집행위원과 규칙제정위원으로 선출되고 국민부장을 맡음. 민족혁명당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을 포괄하는 민족연합전선 정당을 지향했으나, 의열단계가 당권을 장악하면서 일부 참여 세력이 잇달아 이탈함.

김규식 (우사)

원세훈, 1923년 1월 3일 상하이에서 개막한 국민대표회의에 노령 한족 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독립운동 지도기관을 세우자는 창조파에 가담. 임시정부의 조직과 헌법을 유지하면서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대립함.

개조파가 회의에서 이탈한 뒤 창조파는 6월 초 국민위원회와 국무위원회를 조직하고 국호를 조선공화국으로 정함. 원세훈과 김규식은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창조파 인사들은 새로운 정부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같은 해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그러나 이 조직은 소련 정부와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지 못하고 이듬해 해산됨.

김규식 (우사) 국민위원회에 함께 참여한 창조파 인사

1919년 1월 18일 개막한 파리 강화 회의, 한국 독립 문제를 정식 의제로 다루지 않은 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 체결과 함께 폐막.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독립 청원서와 항고서를 제출하고 각국 대표단에 한국 문제의 의제 상정을 요청했으나, 승전국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외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음. 민족자결주의가 승전국의 식민지에는 적용되지 않는 선택적 원칙이라는 한계가 드러났으며, 외교를 통한 독립운동도 큰 타격을 받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인 김규식,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한국 독립 항고서」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 『한국 독립과 평화』를 비롯한 홍보 문서도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하며 일제 식민 지배의 실상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알림. 한국 문제가 강화 회의의 정식 의제로 채택되지는 못했으나,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한국인의 독립 요구를 국제사회에 전달한 대표적인 외교 활동.

김규식 (우사)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 파리에 체류하던 김규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으로 선임. 임시정부는 4월 13일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 강화 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 김규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공식 외교관의 자격으로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전개함.

신한청년당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한 한국 대표로서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 파리 샤토당 거리 38번지에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파리한국통신부를 운영하며 한국 독립을 알리기 위한 외교·홍보 활동에 착수. 회의 참석 자격이 정부 대표로 제한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 수립과 대표 신임장 발급을 요청함.

김규식 (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