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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애치슨이 이끄는 국무부 원자력위원회 산하 자문단이 「국제 원자력 통제에 관한 보고서」를 완성함. 오펜하이머는 데이비드 릴리엔털 등과 자문단에 참여해 보고서 작성에 큰 역할을 했으며, 핵물질 채굴과 핵무기 생산 가능 시설을 국제적인 원자력개발기구가 관리하도록 하는 방안을 제안함. 보고서는 같은 달 28일 공식 공개됨.

히로시마·나가사키 폭격 직후 오펜하이머가 대표로 서명한 임시위원회 과학패널이 전쟁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서한을 제출함. 더 강력한 핵무기가 개발될 가능성이 높고 효과적인 군사적 방어책을 마련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며, 핵무기 우위만으로 미국의 장기적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전쟁 자체를 방지하기 위한 국제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함.

오펜하이머·엔리코 페르미·아서 콤프턴·어니스트 로런스로 구성된 임시위원회 과학패널이 원자폭탄의 최초 사용 문제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함. 과학자들의 의견이 기술적 시범부터 직접 군사 사용까지 갈렸음을 밝히면서, 전쟁을 종결할 가능성이 있는 순수한 기술 시범을 제시하지 못했고 직접적인 군사 사용에 대한 수용 가능한 대안도 찾지 못했다는 입장을 밝힘.

오펜하이머가 버클리에 한스 베테, 에드워드 텔러, 로버트 서버 등 이론물리학자들을 모아 핵분열 무기의 가능성과 설계, 임계질량, 폭발 메커니즘 등을 검토하는 연구를 조직함. 연구 결과는 원자폭탄 개발에 필요한 이론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정리했고, 오펜하이머가 이후 중앙 무기연구소를 이끌 후보로 부상하는 계기가 됨.

오펜하이머와 조지 볼코프가 일반 상대성이론과 축퇴 중성자 물질의 상태방정식을 이용해 중성자 핵의 중력평형을 계산한 「On Massive Neutron Cores」를 발표함. 일정 질량을 넘는 경우 정적인 평형해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음을 보이며 이후 중성자별 최대질량과 중력붕괴 연구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됨.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멜바 필립스가 「Note on the Transmutation Function for Deuterons」를 발표함. 중수소핵이 무거운 원자핵과 충돌할 때 중성자가 포획되고 양성자가 방출될 수 있는 핵반응 메커니즘을 분석함. 후대에 이러한 반응이 오펜하이머-필립스 과정으로 불리게 됨.

오펜하이머가 UC 버클리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서 교수 활동을 시작함. 두 학교를 오가며 연구·교육을 이어가고 젊은 이론물리학자와 대학원생들을 모아, 특히 버클리를 미국 이론물리학의 주요 연구 거점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여함.

제니퍼 그랜홈 미국 에너지부 장관이 195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의 오펜하이머 보안 인가 결정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는 장관 명령을 발령함. 에너지부는 당시 절차가 원자력위원회 자체 규정을 위반했고 편향과 불공정의 영향을 받았다고 판단함. 이는 사망한 오펜하이머에게 보안 인가를 다시 부여한 것이 아니라 1954년 결정 자체를 무효화한 조치임.

미국 원자력위원회(AEC)가 4대1 표결로 오펜하이머의 제한자료 접근 인가를 복원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함. 위원회는 불충성이나 기밀 유출 자체를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과거의 관계와 판단·신뢰성 문제를 근거로 접근을 거부함. 그의 AEC 자문계약이 만료되기 직전에 내려진 결정으로, 이후 미국 정부의 핵정책 결정 과정에서 오펜하이머의 공식적 영향력이 사실상 종료됨.

미국 원자력위원회 인사보안위원회가 오펜하이머의 제한자료 접근 자격을 심사하는 비공개 청문회를 개최함. 과거 공산당원·좌파 인사들과의 관계, 슈발리에 사건에서의 진술, 수소폭탄 개발에 대한 입장 등이 집중적으로 다뤄짐. 인사보안위원회는 5월 27일 2대1로 보안 인가를 복원하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오펜하이머가 미국에 불충성했다는 증거는 없고 충성심을 뒷받침하는 상당한 증거가 있다고도 명시함. 2022년 미국 에너지부는 당시 심사 절차에 자체 규정 위반과 불공정이 있었다고 판단함.

미군이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나가사키 상공에서 플루토늄 내폭형 원자폭탄 Fat Man을 폭발시킴. 트리니티 시험에서 검증한 것과 같은 기본적인 내폭 방식의 무기였으며 로스앨러모스 연구소가 개발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함. 나가사키의 공식 추모기관 자료는 1945년 말까지 약 7만~7만4천 명이 사망하고 약 7만5천 명이 부상한 것으로 추산함. 중국인·조선인 강제노동자와 외국인 전쟁포로도 피해자에 포함됨.

미군이 일본 히로시마에 우라늄 건배럴 방식의 원자폭탄 Little Boy를 투하함. 오펜하이머가 이끈 로스앨러모스는 사용된 핵무기의 설계·개발을 담당했지만 실제 투하의 군사적 명령권자는 아니었음. 히로시마시는 정확한 사망자 수를 확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하며 1945년 말까지 약 14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함. 피해자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대만 출신자와 중국인, 외국인 포로 등도 포함됨.

오펜하이머가 이끄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진이 뉴멕시코 사막에서 플루토늄 내폭형 핵장치 Gadget을 폭발시켜 세계 최초의 핵폭발 시험에 성공함. 실험은 1945년 7월 16일 새벽 실시되었으며 로스앨러모스가 개발한 내폭 시스템의 실제 작동 가능성을 입증함. 이후 같은 기본 방식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Fat Man에 사용됨.

레슬리 그로브스와 제임스 코넌트가 오펜하이머에게 서한을 보내 뉴멕시코 특별연구소의 Scientific Director로서 권한과 책임을 공식 확인함. 오펜하이머에게 연구소의 과학 업무 수행, 연구방향 결정, 민간 인력 관리와 보안 등의 책임을 부여함. 기존 이벤트에 적힌 1943년 4월 20일은 미 육군 공병대와 캘리포니아대학교의 로스앨러모스 운영 계약일이므로 오펜하이머 개인의 ‘공식 인사 발령일’로 보지 않음.

미국 과학연구개발국장 배니버 부시가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가 참석한 회의에서 오펜하이머를 새로운 핵무기 중앙연구소 책임자로 삼는 방안을 승인함. 이후 그로브스와 오펜하이머는 연구소 부지를 물색했고 뉴멕시코 로스앨러모스를 Project Y의 장소로 선정함.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 레슬리 그로브스가 오펜하이머에게 핵무기 물리 연구와 설계를 담당할 새로운 중앙 연구소 Project Y를 이끌 것을 요청함. 오펜하이머는 대형 연구소 운영 경험은 없었지만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여러 이론 분야를 폭넓게 이해하고 연구자들을 통합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되어 선택됨.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교 캐번디시 연구소에서 J. J. 톰슨 아래 대학원 연구를 시작함. 실험물리학 연구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럽에서 급속히 발전하던 양자역학에 관심을 돌렸고, 이듬해 막스 보른의 초청을 받아 괴팅겐대학교로 이동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