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5월 13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민족운동단체 흥사단을 창립함. 청년학우회를 확대 조직해 안창호 등 발기인 6인이 창단발기인대회를 개최하고 안창호를 전권위원으로 선출함. 무실역행과 인격 수양을 통한 민족 역량 강화를 지향한 흥사단 운동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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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와 최남선 등이 신민회의 외곽 청년 조직으로 청년학우회를 창립함. 무실·역행 등의 덕목을 내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청년 수양 단체. 1910년 한일병합과 105인 사건으로 해산되었으나 그 이념이 흥사단으로 계승된 원류.
한삼현·윤재명·정인숙·윤성운·전재풍·이덕환·최유문 등 평양 지역 인사들이 1908년 평양 마산동에 평양자기제조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이승훈이 초대 사장을 맡음. 조선인용 식기 생산과 근대 요업기술의 확산을 목표로 한 식산흥업 사업. 신민회의 산업진흥 구상과 맞닿은 근대 기업이지만 안창호를 직접 발기인으로 단정할 근거는 확인되지 않음.
1908년 평양에 중등 교육기관 대성학교를 설립함. 민족운동을 이끌 간부 양성을 목표로 지식 교육과 애국심·상무 정신 함양을 병행함. 신민회 교육 구국 사업의 대표적 성과.
1907년 귀국해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 신민회 결성을 주도함. 교육·산업·언론을 통한 실력양성과 국민 계몽을 지향함. 대성학교·오산학교 설립과 태극서관 운영 등 국내 실력양성운동의 중심이 됨.
190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재미 한인 단체 공립협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맡음. 회관을 건립하고 기관지 《공립신보》를 발행함. 흩어져 있던 재미 한인을 결집한 미주 독립운동 조직화의 기반.
1902년 선진 교육을 배우고자 미국 유학길에 오름. 그해 10월 샌프란시스코에 정착해 소학교에 입학하며 영어 공부를 시작함. 이후 재미 한인사회 조직화와 독립운동의 무대가 된 전환점.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에 근대 사립학교 점진학교를 세움. 강서 지방 최초의 근대 학교로 초등 과정 남녀공학을 실시함. 교육을 통한 민족 실력양성을 지향한 안창호 교육운동의 출발점.
1894년 평안남도 강서군 동진면 탄포리의 교회가 판동교회에서 분립함. 대한예수교장로회 계열 기록은 안창호를 전도인으로, 서순화·김용기·오하준을 창설 교인으로 전함. 뒤에 당회를 조직하고 지역 장로교회로 활동한 사실이 관보와 당시 신문 자료에서 확인됨.
안창호가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세력의 조직적 결집을 목표로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함. 1920년대 후반부터 추진한 민족유일당 운동과 독립운동 세력 통합 구상의 연장선에 해당함.
안창호와 흥사단 계열 인사 및 만주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지린성에서 농민호조사를 조직함. 한인 농민의 경제적 자립과 생활 개선을 지원하고 이를 독립운동의 장기적 기반으로 연결하려는 이상촌 건설 구상의 일부였음.
안창호가 통합을 권유해 온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가 수양동우회로 통합됨. 흥사단의 국내 계열 조직이 하나로 정비되면서 인격 수양과 민족운동을 결합한 안창호의 국내 조직 기반이 형성됨.
독립운동 세력 간 노선 갈등 속에서 안창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각 통일을 시도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함. 이후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전체의 진로를 재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함.
상하이·한성·연해주 등에서 구성된 임시정부 계통이 통합되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 체제가 성립함. 안창호는 정부 통합을 적극 추진하고 새 체제에서 노동국총판 등을 맡아 임시정부 운영에 참여함.
3·1운동 이후 안창호가 대한인국민회 원동위원 자격으로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함. 연통제와 교통국 설치, 독립운동 세력의 임시정부 통합 등을 추진하며 임시정부의 조직 기반을 정비함.
안창호가 미주 한인 독립운동의 대표적 통합 조직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선출됨. 흥사단을 통한 인재 양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를 기반으로 재미 한인사회의 조직화와 독립운동 지원을 이끌게 됨.
중국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이 난항을 겪은 뒤 안창호가 러시아를 거쳐 미국으로 이동함. 이후 미주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조직 정비와 지도자 양성에 집중함.
안창호가 국권피탈 전후 중국으로 망명해 독립운동의 새로운 거점을 모색함. 산둥성 칭다오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회의를 열고 북만주에 집단 거주지와 군사교육 기반을 조성하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자금 부족과 노선 차이로 실현하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