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스트럭 종료로 크라이테리언의 스트리밍 거점 중단
필름스트럭이 서비스를 종료함. 크라이테리언은 10월 공식 발표에서 터너와 워너브러더스 디지털 네트웍스의 종료 결정을 전하고, 영화와 자체 제작 콘텐츠를 디지털 공간으로 되돌릴 방안을 찾겠다고 밝힘. 영화가 디지털로 유통되고 있어도 플랫폼의 사업 결정에 따라 관객 접근이 끊길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음.
편집일 기준 · 한국 시간
필름스트럭이 서비스를 종료함. 크라이테리언은 10월 공식 발표에서 터너와 워너브러더스 디지털 네트웍스의 종료 결정을 전하고, 영화와 자체 제작 콘텐츠를 디지털 공간으로 되돌릴 방안을 찾겠다고 밝힘. 영화가 디지털로 유통되고 있어도 플랫폼의 사업 결정에 따라 관객 접근이 끊길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음.
크라이테리언이 첫 블루레이 판본들을 출시함. 12월 15일 공식 글은 첫 네 판본이 판매 중이라고 알리며 고화질 시대의 출발을 선언함. DVD보다 높은 해상도의 감상 매체를 마련한 변화였지만, 좋은 판본의 품질은 디스크 규격뿐 아니라 원본 자료·복원·색보정·음향 처리의 선택에 달려 있었음.
피터 베커가 이클립스라는 새 시리즈의 취지를 공개함. 충분한 복원과 부가자료를 갖춘 정규 특별판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리는 동안 많은 영화가 계속 보이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구상이었음. 감독이나 주제를 중심으로 간소한 판본을 묶고 구할 수 있는 최선의 영상 자료를 활용하되, 모든 작품에 정규판 수준의 전면 복원을 약속하지는 않았음.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시상식 항의를 올림픽의 정치화로 간주하면서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에게 제재가 가해지고 두 선수가 선수촌을 떠나게 됨. 이미 마친 200m 경기의 메달은 박탈되지 않았음. 세계 정상급 경기력을 인정받은 선수라도 인종차별 문제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면 스포츠 기구의 제재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드러낸 사건이었음.
중국 표준시 오전 9시, 주취안 위성발사센터에서 양리웨이 1명이 탑승한 선저우 5호가 창정 2F 로켓으로 발사되었음. 네 차례 무인 시험비행에 이어 처음으로 사람이 탑승한 선저우 임무였음.
궤도 진입에 성공하면서 중국은 소련·러시아와 미국에 이어 독자적으로 사람을 지구 궤도에 보낸 세 번째 국가가 되었음. 다만 첫 유인 임무의 완결은 이튿날 안전한 귀환과 회수까지 확인되어야 했음.
중국이 유인우주계획을 승인했음. 계획은 사람을 우주에 보내고 귀환시키는 첫 단계에서 시작해 우주유영과 도킹 등으로 기술을 확장하고, 장기적으로 우주정거장을 건설하는 단계적 구상을 담았음.
선저우 5호는 이 계획의 첫 유인 비행을 실현한 임무였음. 계획의 출범과 2003년 실제 유인 발사를 구분하면, 첫 성공까지 필요한 개발 기간과 준비 과정을 이해할 수 있음.
선저우 5호의 귀환 캡슐이 중국 표준시 오전 6시 23분 내몽골에 착륙했음. 양리웨이는 약 21시간 23분 동안 지구를 14차례 돈 뒤 귀환하여 첫 유인 임무를 마쳤음.
사람을 궤도에 올리는 것만으로 임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음. 귀환과 회수의 성공까지 확인되면서 중국은 독자적인 유인 발사와 회수 능력을 실제 비행으로 보여 주었음.
선저우 1호가 중국 표준시 11월 20일 새벽 발사되었음. 사람을 태우기 전 발사체와 우주선, 귀환을 포함한 기본 운용 체계를 확인하는 첫 비행이었음.
국제 자료에서 11월 19일로 표기되는 경우는 협정세계시와 중국 표준시의 차이를 확인할 필요가 있음. 선저우 5호의 첫 유인 발사에 앞서 이루어진 무인 시험 단계였음.
선저우 3호가 3월 25일 밤 발사되었음. 우주비행사 탑승을 앞둔 개발 과정에서 우주선과 발사체의 신뢰성을 확인하고 안전 관련 체계를 검증하는 시험이 이어졌음.
5호의 성공은 이처럼 여러 차례의 무인 시험에서 축적한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음. 시험비행의 반복은 사람을 태운 최초 비행에서 감수해야 할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한 과정이었음.
선저우 2호가 중국 표준시 1월 10일 발사되었음. 첫 시험비행의 경험을 이어받아 선저우 계열 우주선의 비행과 운용 능력을 추가로 검증한 단계였음.
이 비행에도 우주비행사는 탑승하지 않았음. 선저우라는 이름을 공유하더라도 무인 개발 시험과 5호의 유인 비행은 임무 성격이 다르므로 구분할 필요가 있음.
중국이 공군 조종사 출신 14명으로 우주비행사 집단을 구성했음. 선저우 5호의 탑승자가 된 양리웨이도 이 집단에 포함되어 유인 비행을 위한 훈련을 받았음.
조종 경험만으로 우주비행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음. 우주선 시스템과 비상 대응, 신체 적응 등에 관한 장기 훈련이 첫 유인 비행의 인적 기반을 마련했음.
선저우 4호가 발사되어 2003년 1월 5일까지 비행했음. 유인 비행에 가까운 구성으로 생명유지 등 관련 체계를 시험했으며, 모의 인체 장비를 활용해 탑승 환경을 확인했음.
108차례의 지구 궤도 비행을 수행한 이 임무는 선저우 5호 이전의 마지막 무인 시험이었음. 사람이 실제로 탑승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음 해 10월의 첫 유인 비행과 구별됨.
멕시코시티 올림픽 남자 200m에서 금·은·동메달을 딴 토미 스미스, 피터 노먼, 존 카를로스가 시상대에 함께 섬.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고개를 숙이고 검은 장갑을 낀 주먹을 들어 인종차별과 불평등에 항의함. 노먼은 올림픽 인권 프로젝트 배지를 착용해 두 선수에게 연대함.
경기 성취를 축하하는 의식이 차별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알리는 비폭력 항의의 무대가 됨. 이후 두 미국 선수에게 가해진 제재와 세 선수에 대한 재평가는 스포츠의 정치적 중립성과 선수의 인권 옹호 사이의 논쟁을 오래 남김.
벨기에 루벤가톨릭대학교가 스포츠를 통한 인종차별·불평등 반대 활동과 비폭력 저항의 모범을 기려 두 선수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함. 1968년의 짧은 항의를 일회성 장면에 가두지 않고, 이후 세대의 운동선수와 시민에게 영향을 준 지속적인 인권 활동으로 평가함.
해리 에드워즈와 켄 노엘 등이 산호세에서 올림픽 인권 프로젝트를 조직함. 국제대회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흑인 선수들이 정작 일상과 스포츠 조직 안에서는 차별받는 현실을 문제 삼음.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로디지아의 참가 배제, 흑인 지도자 기회 확대 등을 요구하며 1968년 대회 보이콧을 논의했으며, 이후 시상식 항의의 배경이 됨.
멕시코시티 올림픽 50주년을 맞아 호주 올림픽위원회가 피터 노먼의 경기력과 인권 연대를 기려 올림픽 공로상 추서를 결정함. 미국 선수들의 항의에 함께한 호주 은메달리스트를 자국 올림픽사의 중요한 인물로 다시 인정한 조치였음. 의회의 2012년 사과와는 별개로 스포츠 기구 차원의 평가가 더해짐.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미국 올림픽·패럴림픽 명예의 전당의 레전드 부문에 함께 헌액됨. 1968년 시상식 항의로 선수촌에서 쫓겨난 뒤 반세기가 지나, 미국 올림픽 운동이 두 사람의 경기 성취와 사회적 기여를 공식적으로 기리는 단계에 이르렀음.
피터 노먼이 세상을 떠난 뒤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가 호주에서 열린 장례식의 운구에 참여함. 서로 다른 나라의 선수들이 1968년 시상대에서 맺은 연대가 대회 이후에도 이어졌음을 보여줌. 노먼은 주먹을 들지 않았지만 인권 배지를 착용하고 두 선수의 뜻을 지지한 당사자로 함께 기억됨.
호주 하원이 피터 노먼의 육상 성취와 시상대에서 보인 용기를 인정하고, 귀국 후 받은 처우 및 생전에 그의 기여를 충분히 인정하지 못한 데 대해 사과하는 동의안을 통과시킴. 최종 문구는 1972년 올림픽 불참 원인을 단정하기보다 공동체의 대우와 뒤늦은 인정에 초점을 맞춤. 2006년 사망한 노먼에게 이루어진 사후적 명예 회복이었음.
학생자치기구가 추진한 기념사업을 통해 리고 23이 제작한 높이 약 6m의 조형물이 산호세주립대학교에 세워짐. 1968년 시상대에서 주먹을 든 두 선수를 형상화했으며, 피터 노먼도 공개 행사에 참여함. 한때 제재의 이유였던 행동을 대학 공동체가 인권 실천의 역사로 기념하게 된 전환점이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