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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03

194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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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북공립국민학교에 열린 3.1절 기념식을 마친 직후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소란 발생.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무시하자 주변 군중이 몰려들어 돌을 던지고 경찰서까지 쫒아감.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판단, 시위대를 향해 발포, 6명이 사망, 8명이 중상. 희생자 중에는 평범한 일반인 포함.

군정 실시 이래 처음보는 광범위한 총파업이 일단락되고, 파업 해결책과 범죄자 재판에 대해 협의 중이라고 알려짐. 이날까지 파업을 선동한 150명을 검거하였다고 조병옥 경무부장이 발표. 당시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

조병옥 경무부장은 담화문을 통해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로 주장하고, 이 사건이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내용을 공표,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몰아감.

참고로 이 사건 직후 미군정 보고서에는 “제주도는 70%가 좌익정당에 동조적이거나 가입해 있을 정도로 좌익의 본거지”라고 기록. 당시 미군정은 3·1절 기념식 참여와 3·10 민관 총파업 참여를 통해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인식. 이후 제주는 일방적인 탄압의 대상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