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이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함형택과 김형도의 아들로 태어남. 당숙 함일형이 세운 삼천재에서 한학을 배우고, 1914년 덕일학교를 졸업하며 신학문 교육을 받기 시작함.
함석헌
씨알사상을 제창하고 일제강점기부터 1980년대까지 무교회주의 신앙과 반독재 민주화·인권 운동을 펼친 한국의 사상가이자 민중운동가, 종교인.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가담해 학업을 중단하고, 오산학교와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를 거치며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와 김교신 등과의 교류 속에서 신앙과 역사관의 토대를 형성한 인물.
동서양의 종교 전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포용적·개방적 종교론을 전개하면서, 역사의 주체를 권력자가 아닌 민중, 곧 '씨알'에서 찾는 사상을 체계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다시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고난을 통해 뜻을 실현하는 민족사 해석을 제시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의 이념을 씨알사상으로 집약. 1956년부터 『사상계』에 시사평론을 발표하며 정치·사회 문제를 거침없이 비판하기 시작.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자유당 정권에 맞서 필화를 겪고, 1970년 『씨알의 소리』를 창간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의 구심 역할 수행. 1979년과 1985년 미국 퀘이커봉사회의 추천으로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고, 200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받음. 종교와 사상, 실천을 하나로 묶어 한국 현대사에서 양심과 비폭력 저항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인물.
타임라인
17함석헌이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함. 일제 학교 당국이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를 거부해 퇴학당한 것으로 전해짐. 이후 약 2년간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로 일한 뒤 오산학교로 진학함.
함석헌이 1921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함. 재학 중 안창호·이승훈·조만식에게서 민족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영모를 만나 신앙과 사상 형성의 중요한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파악.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으로 나아감.
함석헌이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제1부에 입학해 1928년 졸업함. 재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은 영향을 받고, 김교신·송두용·정상훈 등과 교류하며 무교회주의 신앙을 받아들임. 제도 교회보다 성서 읽기와 개인의 신앙적 결단을 중시하는 관점이 이후 그의 종교사상과 사회 참여의 중요한 토대가 됨.
함석헌이 1927년 2월 김교신·송두용·류석동·정상훈·양인성과 함께 무교회주의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함. 『성서조선』은 성서 해석을 바탕으로 신앙·교육·민족 문제를 다룬 매체로, 이후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1942년 폐간될 때까지 발행됨.
함석헌이 1928년 4월 귀국해 모교인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고, 1938년 3월 사임할 때까지 역사와 수신을 가르침. 재직 중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신앙을 함께 가르치며 교육자로 활동함.
함석헌이 1940년 평안남도 대동군 송산리에서 김혁이 운영하던 송산농사학원을 경영하던 중 계우회사건에 연루됨. 대동경찰서에서 약 1년간 구류 생활을 함. 이후 1942년 『성서조선』 필화사건으로 다시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하게 되는 일제 말기 탄압의 전조가 된 사건.
함석헌이 『성서조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경찰서에서 1년간 미결수로 복역함. 이 사건으로 김교신·함석헌 등 『성서조선』 관계자들이 검거되었고, 잡지는 강제로 폐간됨.
함석헌이 『사상계』 1958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6·25전쟁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발표함. 글은 한국전쟁을 미·소 냉전 질서 속의 비극으로 바라보고, 반공·북진통일 구호 아래 비판을 억누르던 이승만 정권의 정치 환경을 비판함.
경찰은 8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함석헌을 구속하고,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연행해 조사함. 함석헌은 8월 25일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됨.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정 추진과 맞물려 벌어진 대표적 필화 사건으로, 『사상계』가 권위주의 정권 비판의 공론장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 계기.
함석헌이 1962년 일우사에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발간함. 이 책은 1930년대 『성서조선』에 연재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바탕으로 개정·증보한 한국사 저술임.
함석헌이 1962년 미국 국무성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함. 방문 중 퀘이커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퀘이커 학교에서 공부함.
함석헌이 1970년 4월 교양·평론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발행인을 맡음. 잡지는 민주주의 발전을 표방하며 시사·사회·사상 문제를 다뤘고, 한글 전용 가로쓰기와 구어체 표현을 사용해 일반 독자가 읽기 쉽게 구성됨. 창간호와 5월호 발행 뒤 문화공보부의 등록취소처분을 받음.
함석헌이 1979년 미국 퀘이커봉사회 관계자들의 추천으로 노벨평화상 후보가 됨. 국내 자료들은 이를 함석헌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첫 사례로 전하며, 1985년에도 다시 후보 추천이 이뤄졌다고 기록함.
함석헌이 1989년 2월 4일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별세함. 향년 87세. 사상가·교육자·종교인으로 활동하며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고 민주화운동과 평화운동에 참여함.
대한민국 정부가 광복절 57주년 기념식에서 함석헌에게 건국포장을 추서. 정부는 일제강점기 언론 활동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한 공적을 인정해 독립유공자로 포상.
함석헌의 유해가 2006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에 안장됨.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에 있던 묘소에서 이장된 것으로, 독립유공자 묘역 329호에 안장됨.
그 외 사실들
기록
함석헌의 주요 저서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 『통일의 길』(1984)이 있고, 주요 시집으로 『수평선 너머』(1953)가 있음.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함석헌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받았으며, 2006년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됨.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