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로 월간 『사상』이 창간됨. 장준하는 연구원에서 잡지의 편집을 맡아 국민사상의 통일, 자유민주주의의 확립, 반공정신의 함양 등을 내세운 전시기 지식인 대상 사상지 발간에 참여함.
『사상』은 통권 4호까지 발행된 뒤, 장준하가 1953년 4월 이를 단독 인수해 『사상계』로 제호를 바꾸면서 독립적인 종합교양지의 전신이 됨.
1953년 4월 장준하가 창간한 월간 종합교양지. 한국전쟁 직후 국민정신 재건을 위해 발간되던 잡지 『사상』(1952년 12월 종간)의 뒤를 이어 출발했으며, 민족 통일·민주사상 함양·경제 발전·새로운 문화 창조를 편집의 기본 방향으로 삼은 전후 한국 지성계의 대표 매체.
역량 있는 신인을 발굴하고 무게 있는 시·소설·평론을 실어 1950~60년대 한국 문단을 이끌었으며, 1955년 동인문학상을 제정해 이듬해 제1회를 시상하는 등 사상·문예 활동의 본산 역할 수행. 함석헌·천관우·신상초·양호민 등 비판적 지식인의 글을 통해 이승만·박정희 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며 1960년 4·19 혁명의 사상적 단초를 마련.
1958년 함석헌의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필화, 1970년 김지하의 담시 「오적」 게재 사건 등 권력과의 충돌을 거듭하다 같은 해 등록이 취소되어 통권 205호로 종간. 광복 후 첫 세대의 의식을 형성하고 한국 민주주의·언론 자유의 흐름에 깊은 자취를 남긴 잡지로 평가.
한국전쟁 중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로 월간 『사상』이 창간됨. 장준하는 연구원에서 잡지의 편집을 맡아 국민사상의 통일, 자유민주주의의 확립, 반공정신의 함양 등을 내세운 전시기 지식인 대상 사상지 발간에 참여함.
『사상』은 통권 4호까지 발행된 뒤, 장준하가 1953년 4월 이를 단독 인수해 『사상계』로 제호를 바꾸면서 독립적인 종합교양지의 전신이 됨.
장준하가 피난 수도 부산에서 국민사상연구원 기관지 『사상』을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로 바꾸고 월간 종합지로 창간함. 민족 통일, 민주사상 함양, 경제 발전을 편집의 기본 방향으로 내세우며 정치·경제·사회·문학·철학·예술을 아우르는 지면을 구성함.
『사상계』는 전후 한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민족 문제를 토론하는 대표적 공론장으로 성장했으며, 장준하의 언론인·사상가·민주화운동가로서의 활동을 상징하는 핵심 매체가 됨.
사상계사가 소설가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동인문학상 제정. 국내 주요 문예지에 발표된 중·단편 소설 중 우수작을 선정해 시상하는 상으로, 이듬해 제1회 수상작 발표. 사상계가 신인 발굴과 문예 활동의 본산으로 자리 잡은 상징적 사업.
함석헌이 『사상계』 1958년 8월호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6·25전쟁이 주는 역사적 교훈」을 발표함. 글은 한국전쟁을 미·소 냉전 질서 속의 비극으로 바라보고, 반공·북진통일 구호 아래 비판을 억누르던 이승만 정권의 정치 환경을 비판함.
경찰은 8월 8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함석헌을 구속하고, 『사상계』 발행인 장준하와 주간 안병욱도 연행해 조사함. 함석헌은 8월 25일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됨. 자유당의 국가보안법 개정 추진과 맞물려 벌어진 대표적 필화 사건으로, 『사상계』가 권위주의 정권 비판의 공론장으로 자리 잡았음을 보여준 계기.
『사상계』는 함석헌·천관우 등 비판적 지식인의 글을 통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 권위주의 통치, 분단 현실과 민주주의의 과제를 꾸준히 다룸. 이러한 논의는 학생·지식인층 사이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정치 참여의 필요성을 성찰하는 지적 토대를 형성함.
4·19 혁명 뒤에는 학생과 시민의 저항을 민주혁명으로 해석하고, 새 민주정치의 방향과 장면정부의 과제를 비판적으로 논의하는 지면을 마련함. 『사상계』가 혁명을 직접 조직한 주체는 아니었으나, 4·19 전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 담론을 형성하고 확산한 대표적 종합교양지 가운데 하나로 평가됨.
『사상계』 1961년 7월호가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를 게재함. 함석헌은 민중의 동의와 참여 없이 이뤄진 군사정변은 참된 혁명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독재와 권력 남용의 위험을 지적함. 글을 게재한 뒤 발행인 장준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에게 끌려가 글을 실은 경위를 심문받음.
글이 실린 같은 시기 『사상계』 6월호 권두언은 5·16을 4·19 혁명의 과업을 수행할 가능성이 있는 군사혁명으로 평가한 반면 (해당 권두언은 편집장 장준하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짐), 함석헌은 민중의 동의 없는 군사정변은 참된 혁명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함.
장준하가 1962년 한국인 최초로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함. 수상 부문은 언론·문학·창조적 커뮤니케이션 예술 분야로, 『사상계』를 통해 전후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민족 문제·지식인 책임을 공론화한 언론 활동이 국제적으로 평가받은 결과.
막사이사이상은 필리핀 대통령 라몬 막사이사이를 기리기 위해 1957년 제정된 아시아의 공공봉사·지도력 관련 국제상. 장준하의 수상은 『사상계』가 국내 지식인 사회의 영향력 있는 종합지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적 차원에서도 주목받았음을 보여주는 사건.
장준하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국회의원 겸직 문제에 따라 『사상계』의 발행권을 부완혁에게 넘김. 부완혁은 같은 해 12월부터 발행인 겸 사장을 맡아 잡지를 운영함.
이는 창간 이래 장준하가 직접 이끌어 온 『사상계』의 경영·발행 체제가 바뀐 전환점. 다만 『사상계』의 비판적 논조와 정치적 성격은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1970년 김지하의 「오적」 게재와 필화 사건, 강제 폐간으로 이어지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사상계』는 1970년 5월호 통권 205호에 김지하의 담시 「오적」을 게재함. 작품은 재벌·국회의원·고급공무원·장성·장차관의 부패와 유착을 풍자했으며, 6월 김지하와 사장 부완혁, 편집담당 김승균 등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됨.
문화공보부는 같은 해 9월 29일 『사상계』의 등록을 무효 처리하며 발행을 막음. 창간 17년 만에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된 것. 발행인 부완혁은 뒤에 등록무효처분 취소소송을 제기해 1972년 4월 대법원에서 승소했으나, 『사상계』는 끝내 복간되지 못함. 박정희 정권기 언론·표현 탄압의 한 결과.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이 문화공보부의 1970년 등록취소처분에 맞서 제기한 행정소송에서 대법원이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림. 정부는 자체 인쇄시설이 없고 인쇄인 등록 요건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었으나, 『오적』 필화 뒤 잡지 발행을 차단한 조치라는 점에서 정치적 탄압 논란이 컸음.
판결로 법적으로는 복간의 길이 열렸지만, 재정난과 필자·인쇄소 확보의 어려움 때문에 『사상계』는 속간하지 못함. 강제 폐간이 단순한 경영 실패가 아니라 국가권력의 행정처분과 맞물린 사건이었음을 확인하는 후속 국면.
『사상계』가 창간 72주년을 맞아 통권 206호이자 재창간 1호 발행. 1970년 통권 20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 뒤 약 55년 만의 정식 재출발.
재창간호는 「응답하라 2025!」를 주제로 내세우고, 과거의 지식인 종합지에서 문명전환을 논의하는 종합지로 방향을 새롭게 제시함. 원래 『사상계』의 역사와 별개로 보지 않고, 장기 중단 뒤 이어진 현대적 계승 국면으로 기록할 만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