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민 (가수) 출생
대한민국의 가수 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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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가수 선민.
브라질의 축구 선수 카시우 하무스.
미국의 영화 감독 다니엘 샤이너트.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던 이한열은 교문 앞에서 독재 타도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가두시위를 하던 중 전투경찰이 쏜 SY-44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짐. 당시 그가 피를 흘리며 동료 학생(박남식 씨 등)에게 부축되어 쓰러지는 장면은 외신기자(정태원 씨)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 세계에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알림. 이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며 6월 민주 항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됨.
대한민국의 배우 장세현.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 김성도. (1914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6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함. 경찰의 원천봉쇄로 대회장에는 소수만 참여했으나, 오후 6시를 기해 차량 경적과 흰 손수건 흔들기 등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이 동참함. 6월 항쟁의 본격적 시작을 알린 날로, 이날 밤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짐.
국본은 6·10 대회를 앞두고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에 맞춰 차량 경적을 울리고 흰 손수건을 흔드는 평화적 시위 지침을 내림. 경찰이 대회장인 성공회대성당을 봉쇄하자 시위는 도심 전역으로 번졌고, 택시·버스 기사들의 경적과 회사원들의 호응이 잇따름. 한편 같은 날 민정당은 잠실체육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 정권의 호헌 의지와 국민의 직선제 요구가 정면으로 충돌한 상징적 하루가 됨.
민주정의당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같은 날 열린 국본의 6·10 국민대회와 정면으로 대비되며, 정권의 권력 승계 의지를 드러낸 행사. 이후 노태우는 6·29 선언을 거쳐 그해 12월 직선제 대선에서 당선됨.
6월 10일 국민대회 뒤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감. 인근 계성여고 학생과 시민들이 도시락·물을 전달하며 지원했고, 사제단의 중재로 6월 15일 오후 자진 해산함. 단발성으로 끝날 뻔한 6·10 국민대회를 지속적 항쟁으로 전환시킨 분기점.
국본이 무차별 최루탄 사용에 항의해 6월 18일 '최루탄추방 국민대회'를 전국에서 개최함. 전국 주요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부산에서는 노동자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 6월 24일 사망함. 회사원·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며 학생 시위가 시민 항쟁으로 확산된 분수령.
국본이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을 전국 37~38개 시·군에서 동시에 벌임. 100만 명 이상이 참여한 6월 항쟁 최대 규모의 시위로, 대도시뿐 아니라 군 단위 농촌까지 시위가 번짐.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함이 분명해지며 정권을 6·29 선언으로 내몬 결정적 항쟁.
민주정의당 대표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1987년 6월 29일 시국수습을 위한 8개 항의 특별선언을 발표함. 여야 합의에 따른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새 헌법에 따른 대선 실시, 공정 경쟁을 위한 선거법 개정, 김대중 사면복권과 시국사범 석방, 기본권 강화, 언론 자유 보장, 지방·교육 자치, 정당 활동 보장 등을 제시함. 전두환의 재가 아래 6월항쟁의 핵심 요구를 사실상 수용한 조치로, 5공화국 권위주의 체제의 후퇴와 민주화 이행을 결정지은 분기점.
6월 민주항쟁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경찰력만으로 시위를 진압하기 어려워지고, 군 투입은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둔 국제적 고립과 광주 재현의 위험을 낳을 수 있던 상황. 전두환 정권은 강경 진압 대신 민주화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하는 방향으로 선회함. 선언은 이후 제9차 헌법 개정과 제13대 대통령 직선제 선거로 이어지는 제도 전환의 출발점이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