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5년 서울 건천동에서 이정과 초계 변씨 사이에서 출생. 본관은 덕수이며 자는 여해(汝諧).
조선의 무신. 본관은 덕수,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부임해 전선·군비를 정비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비했으며, 임진왜란 발발 뒤 옥포·사천·당포·한산도·부산포 등에서 일본 수군을 연이어 격파한 지휘관.
1593년 초대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되어 조선 수군의 지휘 체계를 통합. 1597년 파직·투옥 뒤 백의종군했으나 칠천량 패전 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되어 수군을 재건하고 명량 해전에서 승리. 1598년 노량 해전에서 철수하던 일본 함대를 공격하던 중 전사. 전쟁 중 기록한 《난중일기》가 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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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식년무과 급제
훈련원별과에서 낙마해 실격한 지 4년 뒤 식년무과 병과에 급제해 권지훈련원봉사로 관직 생활을 시작. 무관 경력의 출발점.
이순신, 녹둔도 사건 뒤 첫 백의종군
조산보만호로 재직하던 중 녹둔도에서 여진 세력의 침입을 막는 과정에서 책임을 추궁받아 문책. 사전에 병력 증원을 요청했던 사정이 참작되어 중형은 면했으나 첫 번째 백의종군.
이순신,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임명
임진왜란 직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되어 전라좌수영에 부임. 전선 제조와 군비 확충, 군사 훈련, 군량 확보 등을 추진하며 일본의 침략에 대비.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함대가 원균의 경상우수영 전력과 합류한 뒤 옥포에서 일본 군선을 공격함.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이 거둔 첫 승전으로, 총통과 활을 활용한 해상 공격의 가능성을 보여줌. 한산도 대첩에 앞서 함대의 실전 경험과 연합작전의 기반을 쌓은 전투였음.
합포 해전 발발
옥포 해전 승전 직후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달아나는 일본 전선을 합포까지 추격해 격파. 임진왜란 첫 출전 당일 옥포 승리에 이어 거둔 연속 승전.
적진포 해전 발발
옥포·합포 승전 다음 날 이순신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적진포에 있던 일본 선단을 공격해 격파.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세 번째 연속 승전.
이순신이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여 사천의 일본 군선을 공격함. 적을 바다 쪽으로 유인하고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했으며, 이순신은 전투 중 어깨에 총상을 입음. 이 해전은 거북선의 첫 실전 투입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인과 화력을 결합한 전술이 이후 해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줌.
당포 해전 발발
이순신 등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당포에 정박한 일본 선단을 공격해 격파함. 이후 당항포·한산도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수군의 연속 공세 가운데 하나가 됨.
제1차 당항포 해전 발발
이순신·이억기·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고성 당항포의 일본 선단을 공격해 대규모로 격파. 사천·당포에 이어 진행된 제2차 출전의 주요 승전.
율포 해전 발발
제2차 출전 마지막 단계에서 이순신이 달아나는 일본 전선을 율포까지 추격해 격파. 사천·당포·당항포로 이어진 연속 해전의 마무리.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작전 협의를 거쳐 함대를 이끌고 출항함.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며 연합전력을 구성함. 이튿날 당포에서 일본 함대가 견내량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이 출전은 한산도와 안골포에서의 연속 해전으로 이어짐.
이순신·이억기·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견내량에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펼치고 화포 공격을 집중함. 조선 측 보고에 따르면 일본 함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격파함. 이 승리는 일본 수군의 서진을 저지하고 호남 방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 조선 연합수군이 안골포에 정박한 일본 함대를 공격함. 일본 함대가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함선들이 교대로 접근하여 화포를 쏘는 방식으로 전투를 전개함. 넓은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친 한산도와 달리 포구의 조건에 맞추어 전술을 바꾼 후속 작전이었음.
이순신·이억기·원균의 연합수군이 일본군의 주요 거점인 부산포로 진출하여 정박 중인 함선들을 공격함. 한산도·안골포의 승전 이후에도 공격적 해상 작전을 이어간 사례였음. 일본군의 병참 거점을 압박한 의미가 있으나, 부산의 육상 거점 자체를 탈환한 전투와는 구분해야 함.
이순신,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조정이 전라·경상·충청의 수군을 통합 지휘할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고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와 겸임하도록 함. 여러 수사가 협력하던 연합작전에 통일된 지휘권을 부여한 제도적 변화였음. 한산도 진영을 중심으로 해상 방어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함대 간 명령과 작전을 조정하는 기반이 됨.
이순신, 한산도로 수군 진영 이전
이순신이 한산도로 수군 진영을 옮겨 일본군의 해상 움직임을 감시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거점으로 삼음. 선조수정실록에는 한산도가 배를 숨기고 주둔하기에 적합하다는 이전 요청과 조정의 허락이 기록되어 있음. 해도 둔전의 설치를 추진하는 등 장기간 함대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 확보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음.
제2차 당항포 해전 발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당항포 일대의 일본 선단을 공격함. 1594년에도 남해에서 조선 수군이 해상 주도권을 유지한 전투 가운데 하나임.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 해협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 수군을 격파한 전투.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큰 피해를 입은 뒤 남은 판옥선 13척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해 일본 함대의 서해 진출을 저지한 사건.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고 조선 수군의 전투 능력을 회복한 중요한 승리. 널리 쓰이는 양력 환산일은 1597년 10월 26일이나, 일부 연구·자료는 10월 25일로 표기하므로 원사료의 음력 날짜와 양력 환산 기준을 구별할 필요.
이순신, 파직·투옥 뒤 백의종군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정보를 둘러싼 출진 문제 등이 문책 사유가 되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음. 정탁의 변호로 추가 신문과 중형을 면한 뒤 권율 휘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
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남은 병력과 전선을 수습해 수군을 재건하고 이후 명량 해전 승리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를 복구.
노량 해전 전날 밤,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지원하려는 일본 구원함대가 노량 수로와 왜교 일대에 집결.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조·명 연합수군의 진형을 정비하고 일본 함대를 맞을 전투태세에 돌입.
순천왜성에서 퇴로가 막힌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남해안 각지의 일본 수군이 순천 방면으로 움직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음력 11월 18일 밤 노량 수로와 왜교 일대에 약 500척의 일본 선박이 집결했다고 전함.
이순신은 일본 구원함대가 고니시군의 철수를 지원하며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려는 움직임으로 판단하고 진린과 함께 진형을 재정비. 약 200척 규모의 조·명 연합수군은 노량 해역에서 일본 함대를 맞을 준비에 들어갔으며, 이어지는 새벽 전투가 노량 해전으로 확대됨.
정확한 시각을 특정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자료는 제한적이므로, 이 사건은 특정 시간대보다 ‘12월 15일 밤 전투태세 돌입’이라는 수준으로 정리.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과 명 수군 도독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이 노량 해역에서 철수 중인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으로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전투 막바지 이순신이 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를 서두르던 가운데, 순천 왜교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 수군이 노량 해역으로 이동.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진린이 지휘하는 명 수군은 일본 함대의 이동을 차단하고 공격하기 위해 노량 일대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
1598년 12월 16일 새벽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 수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며, 전투는 노량에서 관음포 일대로 이어짐. 연합 수군은 철수하려던 일본 함대를 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일본 함대 일부는 전투를 뚫고 빠져나감. 명 수군에서도 등자룡이 전사하는 등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격전.
전투 막바지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총탄을 맞아 전사. 그러나 전투는 계속됐고 조·명 연합 수군은 일본군의 퇴각을 압박. 노량 해전은 일본군 철수 자체를 결정한 전투라기보다 이미 진행 중이던 철수 국면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해상 결전으로, 임진왜란 종결을 상징하는 전투로 남음.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철수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아 전사.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 도중 발생한 죽음.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과 함께 철수하려는 일본 함대를 공격하며 전투를 지휘. 전투가 노량에서 관음포 일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조·명 연합 수군은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입히며 추격전을 계속함.
전투 막바지 이순신은 지휘 중 총탄을 맞아 전사. 그의 죽음은 전투가 끝나기 전에 발생했으며, 지휘부는 전열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이를 즉시 널리 알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짐. 이후 조선 수군은 전투를 이어가 일본 함대의 철수를 압박.
이순신의 전사는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과 겹치며 강한 상징성을 갖게 됨. 노량 해전의 승전과 함께 그의 생애 마지막 전투로 기억되며, 이후 조선에서는 전쟁 수행과 수군 지휘에서의 공적을 기리는 평가가 이어짐.
이순신, 선무공신 1등 책록
임진왜란에서 세운 무공을 인정받아 사후 선무공신 1등에 책록. 이순신·권율·원균 3인이 1등 공신으로 선정되고 이순신에게 공적과 포상 내용을 담은 교서 반급.
이순신에게 ‘충무’ 시호 추증
인조가 이순신의 생전 공덕을 기려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추증. 이후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호칭이 역사적 기억과 현양의 대표 명칭으로 정착.
《이충무공전서》 간행
정조의 명령으로 이순신이 남긴 글과 그의 생애에 관한 기록을 모아 《이충무공전서》를 출판. 책의 제5~8권 부분에 일기를 싣고 《난중일기》라는 제목을 붙인 작업. 나중에 손글씨 원본의 일부가 없어지고 난 뒤에도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준 국가 차원의 출판 사업.
《난중일기》 등 이순신 기록유산, 국보 지정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 일곱 권과 《서간첩》·《임진장초》를 합친 아홉 권의 기록을 국보로 지정. 현재 국가유산 목록에 등록된 지정일은 1962년 12월 20일. 조선 수군의 활동과 전쟁 상황, 이순신의 삶을 보여주는 원본 기록을 한데 묶어 보호하기 위한 지정.
《난중일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 확정
유네스코가 국제자문위원회의 심사 결과와 추천을 받아들여 《난중일기》를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올리기로 확정. 전쟁 중 군대를 이끈 당사자가 직접 쓴 일기로서 드문 사례이며, 역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라는 가치를 인정한 결정. 문화재청의 공식 발표일은 다음 날인 6월 19일.
그 외 사실들 1건
기록
이순신은 임진왜란 기간의 군무와 전황, 개인적 소회 등을 《난중일기》에 기록했으며, 이 기록은 전쟁 당시 조선 수군과 이순신의 활동을 이해하는 핵심 사료로 전해짐.
《난중일기》 관련 기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