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와 제5공화국 시기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이자 정치인.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해 초대·2대 의장을 맡았고,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당한 뒤 법정에서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함. 이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등 재야 민주화운동을 이어가다 1995년 제도정치에 진출해 3선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원내대표·의장,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을 역임함.
추가 정보
1965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한 뒤 학생운동에 참여함. 1967년 상과대학 대의원회 회장으로 대통령선거 부정 규탄 시위에 참여했다가 연행·제적되고 군에 강제징집됐으며,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지명수배돼 피신생활을 시작함. 1970년대에도 긴급조치 9호 철폐 운동 등과 관련해 수배가 이어짐.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해 초대·2대 의장을 맡으며 공개적인 민주화운동 조직 활동을 전개함.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연행돼 23일 동안 물고문과 전기고문 등을 당했고, 같은 해 12월 첫 공판에서 고문 사실을 직접 폭로함. 수감 중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F.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했으며, 1988년 가석방된 뒤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창설에 참여해 정책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음. 1990년 다시 구속돼 1992년까지 수감됨.
1995년 민주당 입당을 계기로 제도정치에 진출하고, 1996년 서울 도봉갑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3선 의원을 지냄. 1997년 김상현·정대철과 함께 범야권 대통령 단일후보 국민경선제를 제안하는 등 정당 내 후보선출 방식의 개혁을 주장했고, 2002년에는 과거 최고위원 경선에서 사용한 정치자금의 규모와 내역을 스스로 공개함. 이 공개는 정치자금 관행의 문제를 제기한 동시에 자신의 정치자금법 위반 문제도 드러낸 사건으로, 이후 형사절차가 이어짐.
2003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2004년 보건복지부 장관, 2006년 열린우리당 의장을 역임함. 보건복지부 장관 재임기에는 건강보험 보장성, 국민연금, 노인장기요양, 금연정책 등 보건복지 분야의 정책을 담당함. 2011년 사망한 뒤 2014년 서울고등법원 재심에서 1985년 사건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무죄가 선고됐으며, 재판부는 고문과 강요로 얻은 진술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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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대통령선거 부정 규탄 시위 참여 후 제적·강제징집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대의원회 회장이던 김근태가 제6대 대통령선거 부정 규탄 시위에 참여해 경찰에 연행된 뒤 학교에서 제적되고 군에 강제징집됨.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 참여가 본격화된 시기의 사건.
중앙정보부가 서울대학교 학생운동 인사들이 국가 전복을 모의했다고 발표한 이른바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에서 김근태가 지명수배됨. 이후 장기간 피신생활로 이어짐.
서울대학교의 김상진 추도 및 긴급조치 9호 철폐 시위와 명동성당 장례미사 등의 배후로 지목돼 김근태가 다시 수배됨. 이후 1979년까지 피신생활이 이어짐.
1983년 9월 30일 서울 성북구 돈암동 가톨릭 상지회관에서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이 결성되고 김근태가 초대 의장을 맡음. 1980년 5·17 이후 공개적인 민주화운동이 크게 위축된 상황에서 학생운동 출신 청년 활동가들이 조직적인 민주화운동을 재개하기 위해 결성한 단체.
민청련은 대학·학번별 모임을 토대로 조직을 구성하고 기관지 발행과 정치·사회 현안에 관한 활동을 전개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민청련 출범 이후 5·17 이후 크게 위축됐던 민주화운동 진영이 다시 활동을 확대하고 재야·각 부문 운동도 조직을 정비하는 계기가 마련됐다고 설명함.
김근태는 초대·2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민청련 활동을 이유로 1985년 연행·고문·기소되는 과정으로 이어짐.
김근태, 김천교도소에서 가석방
김근태가 약 3년의 수감생활 끝에 김천교도소에서 가석방됨. 1985년 구속과 고문 이후 이어진 첫 번째 장기 수감생활이 끝난 사건.
김근태가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창설에 참여하고 정책실장을 맡음. 이후 집행위원장으로 선출돼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재야 민주화운동을 계속함.
민자당 반대 시위와 관련해 김근태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됨. 이후 전민련 결성선언문과 범민족회담 제의 등을 이유로 국가보안법 혐의가 추가됐으며, 1991년 항소심에서 징역 2년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음.
김근태, 2년여 수감 마치고 출옥
전민련 활동과 관련한 약 2년 3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김근태가 홍성교도소에서 만기 출옥함. 이후 다시 재야 민주화운동과 정치개혁 활동에 참여함.
김근태, 민주당 입당하며 제도정치 진출
김근태가 민주당에 입당해 부총재로 선임되며 제도정치에 진출함. 같은 해 사면복권된 뒤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로 활동하면서 재야 민주화운동에서 의회정치로 활동 영역을 넓힘.
김근태,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김근태가 서울 도봉갑에서 제15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처음 국회에 입성함. 이후 제16·17대 국회의원까지 3선 의원으로 활동함.
김근태·김상현·정대철, 대통령후보 국민경선제 제안
새정치국민회의의 김근태·김상현·정대철이 범야권 대통령 단일후보를 국민경선 방식으로 선출하자고 공동 제안함. 정당의 대통령후보 선출 과정에 당원과 국민의 참여를 확대하려는 정치개혁 구상.
김근태, 최고위원 경선 정치자금 사용 내역 공개
2002년 3월 3일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참여 중이던 김근태가 2000년 8·30 최고위원 경선에서 약 5억3,800만 원을 사용했으며, 이 가운데 약 2억4,000만 원을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공개함. 불투명한 당내 경선자금 관행을 문제 삼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실도 스스로 공개한 사건.
김근태는 기자회견에서 대선후보 당내 경선에 과도한 자금과 조직이 동원되는 정치 현실을 바꾸기 위해 과거 최고위원 경선비용을 공개한다고 밝힘. 공개 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사실관계 파악에 나섰고 다른 경선 후보들의 정치자금 문제도 논쟁이 됨.
이 공개는 정치자금 투명성 문제를 공론화한 행동이었지만, 동시에 본인이 신고하지 않은 정치자금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대한 법적 책임 문제도 발생시킴. 따라서 정치개혁 행보와 위법한 자금 사용이라는 두 측면을 함께 기록함.
김근태,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선출
김근태가 열린우리당 초대 원내대표로 선출됨. 창당 초기 원내 운영을 이끌고 정치자금 공개와 정치개혁 논의에 참여함.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 취임
김근태가 열린우리당 의장에 취임해 2007년 2월까지 당을 이끔. 보건복지부 장관을 거쳐 집권여당 지도부를 맡은 시기의 사건.
김근태 사망
2011년 12월 30일 오전 5시 31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64세로 사망함. 수년간 파킨슨병으로 투병하던 중 같은 해 11월 뇌정맥혈전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고, 이후 폐렴·신장염·패혈증 등 합병증이 겹치며 병세가 악화됨.
김근태는 사망 당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으로 활동 중이었음.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이후 장기간 건강 문제를 겪어왔다는 사실도 사망 당시 여러 언론에서 함께 조명됨. 다만 파킨슨병이나 최종 사망 원인과 고문의 직접적인 의학적 인과관계는 단정하지 않음.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민주화운동·정치권 관계자와 시민들의 조문이 이어짐.
경찰이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 의장 김근태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해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함. 김근태는 9월 26일 검찰로 송치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첫 공판에서 고문 경위와 후유증을 공개 진술하고 법원에 조사를 요구함.
가족과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은 김근태의 소재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관을 찾아다녔고, 고문 피해는 인재근 등을 통해 국내외 언론과 인권단체에 알려짐. 이후 이근안 등 수사관들에 대한 형사절차와 국가배상소송, 김근태 본인의 재심으로 이어짐. 전두환 정권 시기 수사기관의 고문과 용공조작을 공론화한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
김근태는 대공분실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반복적으로 당했으며, 이후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직접 진술함. 남영동 고문실태 조사 자료에도 1985년 9월 4일 연행과 9월 26일 검찰 송치, 전기·물고문 피해 및 이후 재판 과정이 기록돼 있음.
가족과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은 김근태의 소재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관을 찾아다녔고, 고문 피해 사실은 인재근 등을 통해 국내외 언론과 인권단체에 알려짐. 이후 이 사건은 수사관들에 대한 형사절차, 국가배상소송, 김근태 본인의 재심으로 이어짐.
1985년 9월 26일 김근태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약 3주간 조사를 받은 뒤 검찰로 송치됨. 이후 국가보안법 및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돼 형사재판에 넘겨짐.
이 사건은 남영동에서의 고문 수사가 끝나고 검찰 수사와 형사재판 단계로 넘어간 시점임. 김근태 측은 이후 재판 과정에서 대공분실에서의 불법구금과 고문, 강요된 진술의 증거능력을 지속적으로 문제 삼음.
수사 과정에서 작성된 진술의 임의성과 신빙성 문제는 김근태 사망 후 열린 2014년 재심에서도 핵심 쟁점이 됐으며, 서울고법은 고문 등에 의해 얻어진 관련 진술을 유죄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함.
김근태, 첫 공판 모두진술에서 고문 폭로
1985년 12월 19일 첫 공판에서 김근태가 모두진술을 통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당한 전기고문·물고문 등 가혹행위를 공개 법정에서 구체적으로 폭로함. 수사기관 내부에서 이루어진 고문 피해를 피고인이 법정에서 직접 증언한 사건.
김근태는 장기간 변호인과 가족의 충분한 접촉이 제한된 상태에서 재판을 준비했고, 모두진술을 통해 대공분실 조사 과정과 고문 피해를 상세히 밝힘. 로버트 F. 케네디 인권상 시상식 자료에도 1985년 12월 19일 법정 진술이 김근태의 인권 활동을 설명하는 주요 기록으로 수록돼 있음.
이후 인재근과 대한변호사협회 관계자 등이 내무부·치안본부 관계자와 수사관·검사들을 불법감금·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하면서 고문 책임을 묻는 법적 절차도 이어짐.
1986년 3월 6일 서울형사지방법원이 김근태에게 국가보안법 및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인정해 징역 7년과 자격정지 6년을 선고함. 김근태 측은 수사 과정의 불법구금과 고문, 고문으로 얻은 진술의 증거능력을 문제 삼았으나 1심은 유죄를 인정함.
같은 해 7월 서울고등법원이 징역 5년·자격정지 5년으로 감형했고, 9월 대법원이 이를 확정함. 이 판결의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은 김근태 사망 후 진행된 2014년 재심에서 무죄로 뒤집힘.
1985년 남영동 고문 수사에서 시작된 사건이 1986년 유죄판결을 거쳐 2014년 재심 무죄로 이어진 사법 절차의 중간 단계.
서울민사지법, 국가의 김근태 불법구금·고문 책임 인정
1992년 1월 30일 서울민사지방법원이 김근태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수사 과정의 고문 사실을 인정하고 국가에 4,5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함.
김근태는 1985년 수사 과정에서 불법구금과 고문을 당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함. 법원은 고문 사실과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인정하고 위자료 지급을 명함.
당시 김근태 본인의 국가보안법 유죄판결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지만, 민사법원에서는 수사기관의 고문에 대한 국가의 배상책임을 별도로 인정했다는 점이 중요함. 이후 김근태 본인의 재심과 추가 국가배상 등 사법적 재평가가 이어짐.
서울고법, 재심에서 김근태 국가보안법 위반 무죄 선고
2014년 5월 29일 서울고등법원이 1985년 민청련 사건 재심에서 김근태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무죄를 선고함. 재판부는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협박·폭행·고문을 통해 얻어진 관련자 진술에 증거능력과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함.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부분은 면소 판결함.
김근태는 1985년 민청련 의장으로 활동하다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은 뒤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됐고, 1986년 징역 5년·자격정지 5년이 확정됨.
김근태가 2011년 사망한 뒤 배우자 인재근이 2012년 재심을 청구함. 재심 재판부는 사건 관계자들의 검찰 진술이 대공분실에서의 협박·폭행·고문으로 허위 진술을 강요받은 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고 이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판단함. 이에 따라 국가보안법 위반 부분에는 무죄를 선고하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부분은 면소 처리함.
1985년 수사 과정에서 제기됐던 고문과 강요된 진술 문제가 사후 재심에서 형사판결의 핵심 판단 근거로 확인된 사건.
김근태·인재근, 로버트 F. 케네디 인권상 공동 수상
1987년 11월 20일 김근태와 인재근이 한국의 민주화운동과 인권 활동을 이유로 로버트 F. 케네디 인권상을 공동 수상함. 당시 김근태는 1985년 민청련 사건으로 수감 중이었음.
로버트 F. 케네디 인권상 시상식 자료에는 김근태의 민주화운동 경력과 남영동 대공분실 고문 피해, 인재근의 인권 활동 등이 소개됨.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실이 발표한 관련 성명도 두 사람의 활동과 당시 한국의 민주화·인권 상황을 주요 배경으로 다룸.
김근태 고문 사건과 한국의 민주화운동이 국내 공안사건을 넘어 국제 인권 문제로 알려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건.
김근태,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 취임
김근태가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취임함. 재임 기간 건강보험 보장성, 국민연금, 노인장기요양, 금연정책 등 보건복지 분야의 정책을 담당함.
그 외 사실들 3건
발언
거대한 암벽을 기어오르는 자가 결코 추락의 공포에 떨지 않고 작은 바위 틈 하나 놓치지 않고 딛고 오르듯이 민주화 운동에 나선 우리는 아무리 작아 보이는 계기라 할지라도 적극적인 자세로 운동 발전의 디딤돌로 살아야 한다.
무릎을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서울형사지방법원 118호 법정 서울형사지법 합의 11부(재판장 서성, 배석 김희근, 여상훈) 심리 중)
만약 우리가 꿈과 영혼을 포기한다면 우리 사회는 결국 형편없는 사회로 전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