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초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 컴퓨터 Alto를 개발하던 제록스 PARC에 합류해 오피스 시스템 그룹과 학습연구그룹을 오감. 이때부터 사용자가 시스템의 복잡성을 떠안아야 하는 당대 인터페이스에 문제의식을 품고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듦. 훗날 복합성 보존의 법칙으로 이어지는 사고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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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말 《용쟁호투》가 서울 국제극장과 아세아극장의 연말연시 상영작으로 편성됨. 당시 보도는 이소룡의 대표작이 곧 국내에 소개된다고 전하며 미국·유럽에서 거둔 흥행을 함께 조명함. 한국영상자료원이 1973년 한국 개봉 포스터를 소장한 작품.
1973년 12월 18일 네 번째 임기 도중 주지사직을 사임. 미국의 중대 과제를 연구하는 민간 위원회(Commission on Critical Choices for America) 활동과 차기 대권 구상에 집중하기 위한 결정. 14년에 걸친 뉴욕 주지사 시대의 종료.
김종필 국무총리가 일본을 방문하여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총리에게 유감의 뜻과 재발 방지를 전달, 같은 내용의 대통령 친서 전달. 이 사과 방문을 통해 한일 양국은 사건을 더 이상 사법적 문제로 다루지 않고,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활동을 문제 삼지 않는 조건으로 사건을 정치적으로 봉합.
북한, 김대중 납치사건과 6·23 선언 등을 문제 삼아 남북대화 중단을 선언. 이로써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이어지던 대화 국면이 중단됨.
관동 대지진 50주년을 맞아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행사 실행위원회가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 ‘관동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비’ 건립. 잘못된 선동과 유언비어로 목숨을 잃은 조선인을 추도하고 이러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조성된 기념물. 이후 매년 9월 1일 추도식이 열리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기억·추모의 중심 장소로 정착.
뉴욕 세계 박람회에서 미국 여성 명예의 전당에 헌액. 헬렌 켈러는 명예의 전당에 최초로 이름을 올린 20명의 여성 중 한 명.
홍콩과 미국의 합작영화 《용쟁호투 (Enter the Dragon)》 1973년 8월 17일에 뉴욕 제한 개봉, 1973년 8월 19일에 북미 전역 공식 개봉. 브루스 리가 서구 주인공의 조력자나 이국적 주변 인물이 아니라 서사를 이끄는 중심 영웅으로 등장한 작품이자 홍콩 무술영화를 세계 주류 시장에 본격 진출시킨 이정표 같은 작품.
무술·비밀 섬·동양적 신비주의 등 기존 오리엔탈리즘의 요소를 일부 유지하면서도, 아시아인 배우의 신체성과 카리스마가 세계 영화시장의 중심에 진입한 전환점. 이후 아시아인을 무술 능력으로만 환원하는 새로운 전형도 함께 강화한 양면적 계기.
동교동 자택에서 내외신 기자 인터뷰 진행. 괴한들에게 납치된 후 눈과 입이 가려진 채 바다에 끌려가 수장될 뻔한 순간을 증언함. 배 위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며 기도하던 중 비행기 소리가 들리고 납치범들이 살해를 포기한 과정을 하느님의 구원으로 표현.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비판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의지 피력.
- 납치 직후 CIA 도쿄 지부와 서울 지부는 긴밀히 소통하며 중앙정보부의 개입을 확신. 특히 한국 공작선 '용금호'가 김대중을 태우고 오사카항을 출발해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
- 당시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 대사는 CIA의 보고를 받은 뒤, 박정희 정권에 "김대중이 죽는다면 한미 관계는 끝장"이라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냄. 미국은 김대중의 '생존 확인'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함.
- 납치범들이 바다에 김대중을 수장하려 할 때, 미국 정찰기가 용금호 상공을 비행하며 위협했다는 증언 있음.
오전 11시경 김대중이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일본 도쿄 그랜드팔레스 호텔에 도착, 통일 당수 양일동 접견. 오후 1시 19분경 면담을 마치고 2212호실 앞 복도로 나오던 중 중앙정보부 요원 5명에 의해 습격 받아 옆방인 2210호실로 끌려가며 납치. 오후 1시 30분경 범인들은 호텔 지하 주차장에 대기 중이던 차량으로 호텔을 빠져나감.
《용쟁호투》가 이소룡이 사망한 지 엿새 뒤 홍콩에서 개봉함. 이소룡이 생전에 촬영을 완료한 마지막 장편 영화로, 이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지에서 흥행하며 그의 국제적 명성을 확립한 작품.
할리우드 자본과 홍콩의 제작 인력·무술 영화 문법이 결합한 작품으로, 쿵후 영화를 아시아 지역의 장르에서 세계적인 대중문화 장르로 확산시킨 분기점.
홍콩의 무술 배우 이소룡이 영화 《사망유희》 제작 도중 홍콩에서 향년 32세로 사망. 당시 공식 사인은 진통제 에쿠아제식에 대한 과민반응으로 발생한 뇌부종으로 발표됨. 다만 이후 열사병이나 저나트륨혈증 등 다른 원인을 제시하는 의학적 가설도 제기됨.
사망 직전 완성한 주연작 《용쟁호투》는 같은 해 7월 홍콩, 8월 미국에서 개봉해 세계적인 흥행을 거두었으며, 이소룡이 국제적인 액션 스타이자 무술 영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됨.
대만 정부가 산업 기술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비영리 응용연구 기관인 공업기술연구원(ITRI)을 신주에 설립함. 노동집약 경공업에 머물던 대만 산업을 기술 기반으로 전환하려는 국가 전략의 출발점. 훗날 TSMC·UMC를 비롯한 대만 반도체 산업이 모두 이곳에서 싹틈.
평화통일의 기반조성을 위해 공산권에의 문호개방,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한국정부의 정책선언.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간 상호 불가침,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 간 상호 내정불간섭과 상호 불가침, 북한의 국제기구 참여 불반대, 공산권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 남북한의 유엔 동시가입 등을 포함한 7개 항의 6·23선언을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