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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창이 1987년 2월 21일 대만 신주에서 TSMC를 설립. TSMC는 반도체 설계·자체 브랜드 제품을 만들지 않고 외부 고객의 설계를 위탁받아 생산만 하는 세계 최초의 전업 파운드리 기업으로 출범.

창업 자본은 대만 정부가 국가발전기금을 통해 48.3%를 출자하고, 네덜란드 필립스가 생산기술 이전과 특허 라이선스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27.6%를 출자했으며, 나머지는 대만 민간 기업들이 부담. 모리스 창이 공업기술연구원에서 축적한 반도체 기술과 인력을 사업화하는 구조.

TSMC의 핵심 원칙은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 제조 전문 회사. 이 모델로 칩 설계 기업이 막대한 공장 투자 없이 제품 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하는 팹리스 산업의 성장 기반을 만듦

TSMC 모리스 창 창업자

모리스 창은 1985년 8월 20일 대만 공업기술연구원(ITRI) 원장에 취임. 대만 정부는 반도체 산업을 전략 산업으로 키우려 했고, 리궈딩 등 정책 책임자들은 미국 반도체 업계에서 제조·경영 경험을 쌓은 그를 산업 육성의 적임자로 판단.

그는 ITRI에서 초대형집적회로(VLSI) 개발과 생산 기반 구축을 이끌며, 연구개발 성과를 민간 기업으로 분리·사업화하는 방향을 강화.

모리스 창

모리스 창은 1983년 약 25년간 근무한 텍사스 인스트루먼츠를 떠난 뒤, 1984년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의 사장 겸 최고운영책임자(COO)로 취임함. TI가 계산기·디지털시계·가정용 컴퓨터 등 소비자 제품으로 경영 자원을 분산하는 동안, 그는 반도체 제조 사업의 성장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었고 회사 안에서 자신의 진로가 막혔다고 판단.

제너럴 인스트루먼트에서의 근무는 약 1년.

모리스 창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는 1961년 모리스 창을 스탠퍼드대학교 전기공학 박사과정에 파견하고 학비와 생활비, 급여를 지원함. 모리스 창은 약 2년 반의 연구 끝에 1964년 박사 학위를 취득.

박사학위 논문은 도핑된 갈륨비소(GaAs) 및 인듐갈륨비소 계열 물질의 광흡수와 광발광을 다룬 연구였음. 학위 취득 뒤 TI로 복귀해 엔지니어링 분야에서 경력을 이어감.

모리스 창

모리스 창은 1958년 실바니아를 떠나 빠르게 성장하던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에 엔지니어링 관리자로 입사함. 이후 약 25년간 근무하며 반도체 사업의 제조·영업·국제 운영을 두루 맡았고, 1980년대 초 기업 그룹 수석부사장까지 승진함.

TI 재직 중에는 생산량 확대에 따라 원가가 하락할 것을 전제로 경쟁사보다 먼저 가격을 낮추는 이른바 학습곡선 가격 전략을 발전·실행함. 이는 점유율 확대와 생산 규모 확보를 통해 다시 원가를 낮추는 선순환을 만들려는 접근.

모리스 창

모리스 창은 1955년 포드 자동차와 실바니아 일렉트릭의 입사 제안을 놓고 고민한 끝에, 당시 작은 반도체 부문이던 실바니아 반도체에 입사함. 첫 업무는 게르마늄 트랜지스터 생산라인의 수율 개선이었으며, 이후 소자 개발까지 맡으며 반도체 제조의 핵심인 공정·수율 문제를 직접 다룸.

모리스 창

모리스 창은 1949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공학 분야의 전문 교육과 취업 전망을 고려해 이듬해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 기계공학과로 편입함. MIT에서 1952년 학사, 1953년 석사 학위를 취득함. 이후 박사과정 자격시험에 두 차례 통과하지 못해 학업을 중단, 취업.

모리스 창

모리스 창(장중머우·張忠謀)이 1931년 7월 10일 중국 저장성 닝보에서 출생함. 어린 시절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의 혼란 속에서 닝보·상하이·광저우·홍콩·충칭 등을 옮겨 다니며 성장. 처음에는 소설가나 언론인을 꿈꿨으나, 보다 안정적인 진로를 권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공학을 선택.

박처원은 1952년 내무부 치안본부순경 시절 받은 무공포장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대공수사와 국가안보 관련 공적을 이유로 여러 훈장·포장·정부표창을 받음. 이후 보국훈장 2개, 근정훈장 2개, 무공훈장 1개, 무공포장 2개, 대통령 표창 4개, 국무총리 표창 2개 등이 공개 기록에서 확인됨.

박처원이 받은 공개 포상은 최소 13건이며, 기관장급 표창 등을 포함하면 실제 수훈·표창은 더 많았을 가능성이 제기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책임으로 유죄가 확정된 인물이 장기간 국가 포상 수훈자 지위를 유지했다는 점에서, 이후 서훈 취소 논의의 배경이 됨.

서울지방법원은 2000년 5월 23일 고문기술자로 알려진 이근안 전 경감의 도피를 지시하고 자금을 지원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박처원에게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함.

박처원은 1988년 이근안에게 도피를 지시했고, 1998년 이근안의 가족에게 도피 자금 1,500만 원을 제공한 혐의가 인정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후에도 대공수사 조직 내부 인사의 책임 추궁을 피하게 하려 한 행위로 평가.

이근안 박처원

대법원은 1996년 1월 5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 축소·은폐에 관여한 박처원 전 치안본부 5차장, 유정방 전 대공수사 5과장, 박원택 전 5과 2계장에 대한 유죄를 최종 확정함.

박처원은 실제 고문 가담 경관이 5명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2명만 가담한 것처럼 사건을 축소하고, 관련 경찰관들에게 허위 진술을 하도록 지시해 나머지 가담자들의 도피를 도운 범인도피죄가 인정됨. 박처원의 형량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으로 확정됨.

1987년 1심 유죄, 1990년 항소심 무죄, 1991년 대법원 파기환송, 1993년 파기환송심 유죄를 거친 끝에 약 9년 만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공작에 대한 대공수사 지휘라인의 형사책임이 최종 확정.

대법원은 1991년 12월 27일 박처원·유정방·박원택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고등법원 항소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환송함.

대법원은 피고인들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실제 가혹행위 관련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이를 은폐·축소하고, 나머지 관련자들의 도피를 도왔다는 공소사실을 항소심이 충분한 근거 없이 배척했다고 판단함. 항소심이 관련 경찰관 진술과 피고인들의 검찰 진술을 배척한 데 채증법칙 위반, 사실오인, 범인도피죄 및 공동정범의 공모 법리 오해가 있다고 봄.

이 판결로 1990년 항소심 무죄 판단이 뒤집히고 사건은 서울고법 파기환송심으로 돌아감.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1990년 8월 17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은폐 혐의로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 유정방·박원택 전 대공수사 간부에게 무죄를 선고함. 재판부는 이들이 사건을 적극적으로 은폐·조작하려 했다는 점을 인정할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판단함.

같은 날 법원은 박종철 사망사건의 수사·발표 과정에서 직무유기와 직권남용 혐의로 기소된 강민창 전 치안본부장에게도 무죄를 선고함. 이로써 박종철 사건의 축소·은폐에 대한 치안본부 지휘라인의 형사책임은 항소심에서 한때 전면 부정됨.

검찰은 판결에 불복해 대법원에 상고.

1990년 항소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뒤 1991년 대법원이 이를 파기환송하자, 서울고등법원 형사1부는 1993년 2월 27일 파기환송심에서 박처원에게 범인도피죄를 인정해 1심과 같은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함.

재판부는 박처원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실제 고문 가담 경관 수를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하고, 관련 경찰관들에게 허위 진술을 하도록 지시해 나머지 가담자들의 도피를 도운 책임이 있다고 판단함.

항소심 무죄로 한때 뒤집혔던 대공수사 지휘라인의 은폐 책임을 다시 인정한 판결.

서울형사지방법원은 1987년 9월 21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범인 축소·은폐에 관여한 전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에게 범인도피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함. 함께 기소된 전 대공수사 5과장 유정방과 5과 2계장 박원택에게는 각각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이 선고.

재판부는 고문 가담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책임자를 두 명으로 축소하고 나머지 가담자들의 도피를 도운 행위를 범인도피로 판단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공작에 대공수사 지휘라인이 직접 관여했음을 사법적으로 처음 인정한 1심 판단.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

6월 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처원 은폐·축소 주도 명동성당 5·18 추모미사가 열린 장소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5월 18일 폭로로 고문 가담 경관이 5명이며 경찰이 범인을 2명으로 축소해 발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검찰이 사건을 재수사함. 1987년 5월 29일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사건 조작 과정에 깊이 관여한 치안본부 대공수사2단장 박처원 치안감,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을 범인도피 혐의로 구속함.

앞서 경찰은 황정웅·반금곤·이정호 등 은폐됐던 고문 가담 경관 3명의 신병을 확보해 검찰에 넘겼고, 이들은 5월 21일 구속됨. 이로써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범인 축소·은폐에 관련된 구속자는 모두 8명으로 늘어남. 대공수사 지휘라인까지 구속되면서 경찰 내부의 조직적 은폐가 공식적으로 확인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