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전쟁이 격화되며 국내 통신사 중 유일하게 화웨이 5G 장비를 쓰는 LG유플러스가 보안 우려의 표적이 됨. 미국은 2018년부터 동맹국에 화웨이 장비 배제를 요청했고, LG유플러스는 주한미군 기지 주변에는 화웨이 장비를 설치하지 않는다고 해명. 화웨이 장비의 가성비·납기와 미국의 안보 압박이 충돌한 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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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유플러스가 SK텔레콤·KT와 함께 같은 날 밤 스마트폰 기반 5G 서비스를 개시하며 한국이 세계 최초 5G 상용화 국가가 됨. LG유플러스는 5G 기지국에도 화웨이 장비를 사용해 국내 통신3사 중 유일하게 화웨이 5G를 도입. 통신 경쟁력을 끌어올린 한편, 곧 중국 장비 보안 논란의 핵심에 서게 됨.
LG유플러스가 CJ ENM으로부터 케이블TV 1위 사업자 CJ헬로의 지분 50%+1주를 약 8천억 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함. 유료방송·미디어 시장에서 규모를 키워 SK텔레콤·KT와의 경쟁에 대응하려는 전략. 통신과 방송의 결합을 가속한 통신업계 인수합병(M&A)의 신호탄.
LG유플러스가 2.6㎓ 신규 주파수 대역 LTE망 구축에 국내 통신사 중 처음으로 중국 화웨이의 통신장비를 도입함. 기존 에릭슨 장비의 공급 차질 속에 화웨이의 가격 경쟁력과 빠른 납기가 채택 배경. 후일 5G 시대 미·중 갈등 속 보안 논란으로 번지는 한국 통신망 화웨이 도입의 출발점.
LTE 상용화 9개월 만에 84개 도시와 전국 889개 군·읍·면, 주요 도로까지 망을 깔아 세계 최초로 LTE 전국망을 완성함. 인구 대비 99.9%, 국토 80% 이상을 포괄했고 세계이동통신공급자협회(GSA)의 공식 인정을 받음. '세계 최초 LTE 전국망' 타이틀로 LG유플러스가 통신 강자로 자리매김한 계기.
LG유플러스가 국내 통신사 중 가장 먼저 4세대 이동통신 LTE를 상용화함. 7월 1일 00시를 기점으로 LTE 전파 쏘아올림. 2G·3G 시절 만년 3위로 밀리던 열세를 LTE 조기 투자로 만회하려는 승부수. 이후 빠른 전국망 구축으로 이어지는 통신 경쟁력 반전의 출발점.
통합법인이 사명을 'LG U+(LG유플러스)'로 바꾸며 새 브랜드를 출범함. 이상철 대표이사 부회장이 '언제 어디서나' 고객 가치를 더한다는 의미를 내세움. 이동통신 3사 중 막내로서 차별화 전략의 출발점이 된 리브랜딩.
2009년 KT와 KTF의 합병에 대응해 LG텔레콤이 LG데이콤·LG파워콤을 흡수 합병하며 유·무선과 초고속인터넷·IPTV를 아우르는 종합 통신사로 통합 출범함. 2009년 11월 27일 임시주총 의결, 12월 3일 공정거래위원회 승인, 12월 14일 방송통신위원회 인가를 거침. 한동안 '통합LG텔레콤'을 임시 명칭으로 사용.
LG텔레콤이 정액제 기반의 개방형 모바일 인터넷 서비스 'OZ(오즈)'를 선보임. 휴대전화에서 일반 웹페이지를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한 시도로 무선인터넷 대중화를 앞당긴 브랜드. 합병 전 LG텔레콤 시기를 대표한 데이터 서비스.
LG그룹이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자로 LG텔레콤을 세워 이동통신 시장에 진입함. 1997년 10월 식별번호 019로 이동전화 서비스를 시작했고 EZ-i·카이 등 휴대전화 인터넷 사업도 전개. 후일 데이콤·파워콤과 합쳐져 LG유플러스 이동통신 부문의 모체가 됨.
정부의 데이터통신 육성 정책에 따라 음성통신을 맡던 한국전기통신공사와 별개로 국내 최초의 데이터통신 전문 회사 한국데이타통신이 출범함. 천리안 등 PC통신과 국제·시외전화, 데이터 서비스를 제공하며 한국 정보화사회의 서막을 엶. 1991년 '데이콤', 2006년 'LG데이콤'으로 이어지는 LG유플러스의 가장 오래된 뿌리.
1939년 10월 16일 경학원에서 열린 전국 유림대회에서 조선유도연합회 결성이 결의됨. 미나미 지로(南次郎) 조선총독 등이 참석한 가운데, 1932년 출범 뒤 유명무실해진 조선유교회를 대신해 전시체제의 유림 동원을 목적으로 조직됨. 황도정신에 입각한 유교 진흥과 황국신민화를 표방한 일제 말기 최대의 관변 유림 단체.
1998년 선경그룹이 주력사 유공의 사명을 'SK'로 바꾸는 동시에 그룹명을 '선경그룹'에서 'SK그룹'으로 변경함. 1953년 선경직물에서 출발한 그룹이 통신·에너지 중심의 현대적 기업집단으로 정체성을 새로 세운 전환점. 이로써 SK텔레콤·SK 등 'SK' 통합 브랜드 체계가 자리 잡음.
1992년 8월 20일 노태우 정부 시절 선경그룹이 컨소시엄을 통해 정부의 제2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됨. 그러나 최종현 회장이 노태우 대통령의 사돈이라는 점을 들어 김영삼 당시 민자당 대선후보 등이 '사돈 특혜' 의혹을 강하게 제기함. 거센 여론에 밀려 선경은 선정 일주일 만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고, 뒷날 제2이동통신 신규 진입 대신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인수로 방향을 틀게 됨.
1980년 말 선경그룹이 정부로부터 국내 최대 정유 공기업이던 대한석유공사(유공)의 경영권과 미국 걸프사 보유 지분 50%를 인수함. 당시 유공은 매출 1조 원이 넘는 국내 1위 기업으로, 매출 2천억 원대의 선경이 자기보다 다섯 배 큰 회사를 삼킨 '새우가 고래를 삼킨' 인수로 평가됨. 정부는 산유국 네트워크를 통한 원유 확보력과 자금 조달 능력을 높이 사 선경을 인수자로 결정했으나, 한편으로는 신군부 실세 개입설 등 특혜 의혹도 따라붙음.
1976년 하이스가 롱아일랜드시티의 폐교(1892년 건립 공립학교) 건물에 P.S.1 현대미술센터를 엶. 그해 6월 개관전 《Rooms》에서 78명의 작가가 옛 교실에 장소 특정적 설치를 선보임. 실험적·현장 중심 현대미술의 거점이 됨.
1971년 앨러나 하이스가 비평가 브렌던 길과 함께 '도시자원예술재단(Institute for Art and Urban Resources)'을 세움. 뉴욕의 버려진 건물을 작가 작업실·전시장으로 바꾸는 것을 목표로 한 대안적 예술 조직. 훗날 MoMA PS1로 이어지는 출발점.
2024년 5월 서울고법이 최태원·노소영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위자료 20억 원과 재산분할 1조 3,808억 원을 노소영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함. 역대 최대 규모의 재산분할로, SK㈜ 지분 등 최태원의 그룹 지배력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재계가 주목함. 사건은 이후 대법원에 상고되어 최종심이 진행됨.
선대 회장 최종현이 1998년 8월 26일 폐암으로 별세한 지 일주일 뒤인 9월 2일, 장남 최태원이 38세의 나이로 SK그룹 회장에 취임함. 젊은 3세 경영인의 등판으로, 이후 SK하이닉스 인수 등 공격적 확장을 통해 SK를 재계 2위 그룹으로 키워냄. 한국 대기업 3세 경영의 대표 사례로 꼽힘.
1988년 최태원이 미국 시카고대 유학 중 노태우 당시 대통령의 장녀 노소영과 결혼해 대통령의 사위가 됨. 재계와 정치 권력이 맺어진 혼사로 주목받았으며, 훗날 SK의 제2이동통신·통신 사업 특혜 의혹이 거론될 때 배경으로 언급되기도 함. 이 결혼은 2010년대 이후 세기의 이혼 소송으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