폰 미제스가 이스탄불 대학교 이학부 학술지에 논문 「Über Aufteilungs- und Besetzungswahrscheinlichkeiten」을 발표하며 생일 문제의 한 형태를 처음 활자화함. 이후 이 문제가 확률론 입문의 고전 사례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된 첫 공식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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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나벨이 American Mathematical Monthly에 논문 「The Estimation of the Total Fish Population of a Lake」를 발표하며, 여러 차례 잡아 표시하고 다시 잡은 자료로 호수 전체의 물고기 수를 추정하는 방법을 제시함. 생일 문제 배후의 충돌 확률 이론이 포획-재포획 통계로 생태학에 응용된 대표 사례. 이 방식은 '슈나벨 방법'으로 불리며 개체수 추정에 널리 쓰임.
영국 수학자 해럴드 대븐포트가 1927년경 생일 문제를 논의한 것이 기록상 가장 이른 사례. 다만 '이미 누군가 제기했을 것'이라 여겨 자신의 발견이라 주장하지 않았고 발표도 하지 않음. 문제의 정확한 기원이 불분명하게 남게 된 배경.
- 앤트로픽이 최상위 ‘미토스(Mythos)’ 계열 모델을 일반용으로 조정한 클로드 페이블(Fable) 5와 제한 접근형 클로드 미토스 5를 공개.
- 페이블 5는 고난도 코딩·분석·지식 작업 성능을 강화하면서, 사이버보안 등 고위험 영역에는 안전장치를 적용한 공개 모델로 출시됨.
- 미토스 5는 같은 계열의 더 강한 모델이지만, 초기에는 선별된 기관과 신뢰 기반 접근 프로그램을 통해 제한적으로 제공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2009년 6월 7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조사 결과를 발표함. 당시 정부가 안기부·내무부·법무부·청와대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대책회의를 최소 두 차례 열어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조작한 사실이 확인됨. 권력기관이 국가폭력 사건을 조직적으로 덮으려 한 정황을 국가기구가 공식 규명한 의의.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숨진 옛 남영동 대공분실(당시 경찰인권보호센터) 자리에 2008년 6월 10일 박종철기념관이 문을 엶. 당시 신문 기사와 박종철의 친필 편지 등 유품이 전시됨. 국가폭력의 현장을 인권·민주주의 교육의 공간으로 전환한 상징적 조치.
언론 보도와 부검 결과로 의혹이 커지자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사건 발생 5일 만에 기존 발표를 뒤집고 물고문 등 가혹행위 사실을 공식 시인함. 수사 경관 조한경과 강진규 2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함. 다만 가담자를 2명으로만 한정해 이후 드러나는 조직적 축소·은폐의 출발점이 됨.
박종철의 사망 직후 현장에 출동했던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 조사실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고 증언하며 단순 쇼크사 발표에 의문을 제기함. 이어 부검을 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황적준 박사가 1월 17일 온몸의 피멍과 폐 손상 등 물고문·전기고문 흔적을 확인함. 경찰의 '쇼크사' 주장을 무너뜨리고 고문치사의 진상을 드러낸 결정적 전환점.
서울대생 박종철,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를 받던 중 물고문으로 사망. 경찰의 은폐 시도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국민적 분노를 일으키며 6월 항쟁의 주요 계기 중 하나가 됨.
경찰은 사망 다음날, 박종철이 조사를 받던 중 책상을 "탁" 치니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단순 쇼크사했다고 공식 발표하며 사건을 은폐하려 함.
대한민국의 전 예천군의원 박종철.
착공 6년 만인 1898년 5월 29일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올려 성당을 완공함. 라틴 십자형 평면에 벽돌로 쌓은 한국 최초의 순수 고딕 양식 대성당으로, 당시 가장 높은 건물이라 '뾰족집'으로 불리며 장안의 명물이 됨. 준공 당시 이름은 자리 이름을 딴 종현성당.
1977년 11월 22일 명동성당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58호로 지정됨.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 성당이라는 건축사적 가치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성을 공인받음. 이후 건물의 보존·복원 관리가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근거가 됨.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명례방(현 명동)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을 지도자로 정기 신앙 집회를 염. 평신도들이 스스로 미사·교리를 나눈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앙공동체로, 오늘날 연구자들이 '명례방 공동체'로 부름. 이 김범우의 집터가 한 세기 뒤 명동성당이 들어선 자리로, 한국 천주교회가 발원한 곳으로 기억됨.
조미수호조약(1882) 이후 종교의 자유를 내다본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회장 명의로 종현 일대 대지를 사들이기 시작함. 조불수호통상조약(1886) 이듬해인 1887년 5월 나머지 부지를 마저 사들여 침계 윤정현의 옛 저택 자리를 확보하고, 그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는 정지작업에 들어감. 매입·건축 비용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지원함.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과 가깝고 궁궐을 내려다본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이 성당 부지의 소유권을 억류하고 공사 중단을 요구함. 1888년 4월에는 명동성당 건립을 직접적 계기로 금교령을 선포해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의 전교 활동까지 막음. 프랑스 공사가 부임해 강하게 항의한 끝에 1890년에야 분쟁이 풀려 공사 재개의 길이 열림.
부지 분쟁이 풀린 뒤 옛 저택을 헐고 1892년 5월 8일 새로 부임한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정초식을 올려 본격 착공함. 설계와 공사 감독은 파리외방전교회 코스트 신부가 맡았고, 양옥 기술자가 없어 벽돌공·미장공·목수를 중국에서 데려와 공사를 진행함. 한국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 성당이 첫 삽을 뜬 시점.
청일전쟁(1894)으로 중국인 인부들이 돌아가고 재정난까지 겹쳐 공사가 지체되던 중, 설계·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벽체 공사가 끝나갈 무렵인 1896년 2월 선종함. 뒤를 이어 프와넬 신부가 감독을 맡아 내부 공사를 속행함. 설계자의 죽음에도 공사가 멈추지 않고 완공까지 이어진 전환점.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고 성당도 종현성당·종현본당으로 불림. 1945년 광복 후 동 이름이 명동(明洞)으로 바뀌면서 성당 이름도 오늘날의 명동성당(명동본당)으로 자리잡음. 지명 변화가 성당의 통칭으로 굳어진 계기.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공동 집전한 3·1절 기념미사 중, 윤보선·김대중·함석헌·문익환 등 재야 지도층이 긴급조치 철폐와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함. 정부가 이를 정권 전복 선동으로 몰아 김대중 등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하면서 이른바 '명동 사건'이 됨. 전직 대통령·정치인·종교인·교수가 함께해 흩어져 있던 재야 민주세력이 연대하는 기폭제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