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군부가 집권에 앞서 언론사 간부를 회유하고 보도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할 계획을 마련함. 보안사령부의 민간정보 수집과 언론인 동향 파악이 결합하면서 언론은 권력 장악을 위한 주요 공작 대상이 되었음. 이후의 해직과 통폐합을 갑작스러운 행정 조치가 아니라 사전 준비된 통제 과정으로 이해하게 하는 대목임.
신군부가 1980년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경영권 포기를 압박하고 신문·방송·통신을 대규모로 재편한 사건임. 언론계의 자율 정화 형식을 내세웠으나 보안사령부 등 국가기관의 강압으로 진행되었으며, 민간 방송사 흡수와 지역신문·통신사 통합이 이루어졌음.
같은 해 언론기본법 제정과 결합하여 제5공화국 언론 통제체제의 토대가 되었음. 후대 진실화해위원회는 공권력이 언론·직업·신체의 자유를 침해한 책임을 인정하고 피해자와 국민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함.
추가 정보
통폐합이 바꾼 것은 무엇인가
언론통폐합은 언론사 숫자만 줄인 사건이 아니었음.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끊고 방송망을 KBS·MBC 중심으로 재편했으며, 여러 통신사의 취재·배급망을 하나로 묶었음. 언론인이 해직되고 경쟁 매체가 사라지면 시민이 비교해 읽고 들을 수 있는 정보도 줄어듦. 공영화라는 명분과 편집·보도의 독립성 보장은 같은 뜻이 아니었음.
사람과 제도를 함께 통제한 과정
1980년 봄의 언론 공작, 검열에 저항한 기자들의 해직, 정기간행물 등록 취소, 11월의 회사 통폐합, 12월의 언론기본법 제정이 서로 이어졌음. 사주에 대한 경영권 포기 압박과 현장 언론인에 대한 취업 제한은 서로 다른 층위의 피해였으며, 일부 피해자는 연행과 가혹행위까지 겪었음. 해직자 규모는 집계 시점과 범위가 달라 자료별 수치에 차이가 있으므로 하나의 숫자만으로 피해를 단정하기 어려움.
저항과 회복의 시간
해직 언론인들은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등을 통해 활동을 이어갔고, 《말》의 보도지침 공개는 제도권 언론에 가해지던 일상적 통제를 드러냈음. 1987년 CBS의 보도 기능 회복과 언론기본법 폐지는 중요한 전환이었으나, 사라진 언론사와 경력의 손실이 모두 원상회복된 것은 아니었음. 이후 국회 청문회와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는 강제성을 확인하고 국가의 책임을 묻는 과정으로 이어졌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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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사령부가 언론사 사장들에게 소집을 통보하면서 통폐합 실행이 본격화됨. 언론사들은 국가기관의 압력 아래 회사와 경영권을 포기하도록 요구받았으며, 이틀 뒤의 협회 결의는 그러한 강제를 자율적 결정처럼 보이게 하는 외형을 제공했음. 통폐합의 핵심은 단순한 기업 합병이 아니라 공권력에 의한 언론 소유구조의 강제 변경이었음.
한국기자협회가 보도검열을 거부하기로 결의함. 언론 현장에서는 이미 언론자유 결의문 채택과 제작 거부 등이 이어졌으며, 광주민주화운동 시기에는 검열에 맞선 저항이 더욱 확산되었음. 그러나 이러한 참여 이력은 뒤이어 진행된 강제해직에서 언론인을 배제하는 사유로 활용되었음.
진실화해위원회가 1980년 언론통폐합과 강제해직에 신군부가 정권 장악 목적으로 관여했다고 조사결과를 발표함. 관련 문서와 언론사 답변, 피해자·관계자 진술을 검토하여 자율 정화라는 설명 뒤의 국가 강압을 확인했음.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명예회복 등 구제조치를 권고하면서 사건을 기업 재편이 아니라 기본권 침해의 문제로 규정함.
문화공보부가 사회정화 방침에 따라 정기간행물 172종의 등록을 취소하여 발행을 중단시킴. 문학·사회비평 매체였던 『창작과비평』 등을 포함한 대규모 폐간 조치로, 신군부는 사회불안 조성과 계급의식 조장 등을 그 명분으로 내세웠음. 비판적 담론이 유통되던 출판 공간을 행정권으로 축소한 조치이며,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으로 이어진 1980년 언론 탄압의 한 단계였음.
신군부, 비판적 언론인 강제해직 추진
보안사령부와 국보위가 언론 통제를 위한 인적 정비에 나서 보도검열에 협조하지 않거나 제작거부에 참여한 언론인 등을 해직 대상으로 지목함. 명단이 각 언론사에 전달된 뒤 사직 종용과 자체 해직이 겹치면서 수백 명의 언론인이 직장을 잃었으며, 일부는 재취업 제한이나 연행·가혹행위까지 겪었음. 이 조치는 같은 해 11월 언론사 통폐합에 앞서 편집 현장의 저항을 약화시킨 일련의 언론장악 과정이었음.
CBS가 신군부의 언론통폐합 조치로 뉴스·보도 방송을 중단함. 같은 달 30일에는 상업광고도 중단되었으며, 선교 중심의 편성으로 방송 범위가 제한되고 일부 방송 인력이 KBS로 전출됨.
CBS가 방송허가사항 일부 변경에 따라 시사보도와 협찬광고 방송을 재개함. 보도 기능 중단 뒤 교회와 시민사회가 정상화 운동을 벌였으며, 1986년 시작된 서명운동과 1987년 특별 생방송을 거쳐 정규 뉴스가 다시 편성됨.
전두환 정부가 국가보위입법회의를 거쳐 제정한 「언론기본법」을 공포함. 이 법은 신문·통신·방송 관련 법체계를 통합하고 언론의 공적 책임을 내세웠으나, 정부가 정기간행물 등록을 취소하거나 발행을 정지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했음. 앞서 이루어진 언론인 강제해직과 언론사 통폐합에 법적 통제 장치가 결합하면서 제5공화국 언론 통제체제가 굳어졌으며, 법률은 민주화 이후인 1987년 폐지됨.
언론기본법폐지법률이 공포·시행되어 1980년 제정된 언론기본법이 폐지됨. 같은 날 방송법과 정기간행물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등 새로운 법률이 마련되어 신문·방송 관련 규율이 다시 나뉘었음. 이는 언론 자유 회복의 중요한 제도 변화였지만, 폐지 자체가 통폐합 피해와 해직 언론인의 문제를 모두 해결한 것은 아니었음.
민주언론운동협의회가 발간한 《말》 특별호가 한국일보 기자 김주언이 제공한 보도지침 584건을 공개함. 자료는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까지 문화공보부가 언론사에 전달한 보도 관련 지시였음. 김주언·김태홍·신홍범 등이 구속·기소되었으나 1995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됨.
국회 언론청문회에서 보도지침과 문화공보부의 언론 통제에 관한 증언이 이루어지고, 다음 날에는 주요 신문사 사주들이 출석함. 언론에 가해진 국가의 강압뿐 아니라 경영진의 대응과 권력과의 관계도 공개적으로 질문받았음. 민주화 이후 통폐합과 해직의 책임을 사회적으로 따지는 장이 열렸으나, 청문회 개최와 피해 회복의 완료는 구분할 필요가 있음.
한국신문협회와 한국방송협회가 임시총회를 열어 신문·방송사의 통폐합과 새로운 통신사 설립을 결의함. 표면상 언론계의 자율 정화였으나 보안사령부가 언론사주들에게 경영권 포기 등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 조치였음. 동양방송과 동아방송 등이 한국방송공사에 흡수되고 지역신문과 통신사가 재편되면서 언론의 소유·경영 구조가 축소되었으며,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과 경쟁적 보도를 억제할 기반이 강화되었음.
1980년 11월 30일 언론통폐합 조치에 따라 동양방송이 서울 본사와 부산지국의 텔레비전·라디오 방송을 종료하고 한국방송공사에 흡수 통합됨. 개국 16년여 만의 폐국으로, 당일 TV와 라디오에서 고별방송이 진행됨.
라디오에서는 황인용이 밤 11시부터 자정까지 《밤을 잊은 그대에게》의 마지막 TBC 방송을 진행함. 그는 종료 시각이 다가오자 남은 시간을 헤아리며 울먹였고 마지막 호출부호를 알린 뒤 방송을 마쳐, 언론통폐합과 TBC 폐국을 상징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회고됨.
동아방송이 마지막 방송을 마치고 KBS에 흡수됨. 동아일보는 앞서 지면으로 방송 종료를 알렸으며, 청취자가 접하던 민영 라디오의 목소리는 강제적인 방송 재편 속에서 사라졌음. 같은 날 동양방송도 폐국하여 신문사가 방송을 함께 운영하던 체제가 해체되었음.
연합통신, 통신사 강제 통합으로 출범
동양통신과 합동통신을 합치고 시사·경제·산업 등 군소 통신사를 흡수한 연합통신이 출범함. 통신사는 신문·방송에 기사를 공급하므로 통신망의 단일화는 독자가 접하는 뉴스의 출발점에도 영향을 미쳤음. 설립 자본금의 일부는 기존 통신사들의 현물출자로 마련되었고, 이후 지분 이전을 거쳐 KBS와 MBC가 대주주가 되었음.
유신 시기와 1980년 언론 탄압으로 해직된 기자들, 출판인 등이 서울 장충동 성베네딕도회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창립함. 언론 민주화와 사회 민주화를 활동 목표로 제시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