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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1699년의 기록 188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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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면서 궁성의 정문인 광화문과 그 안쪽 중문인 홍례문도 소실됨. 궁궐의 남쪽 출입·의례 공간이 함께 훼손된 사건으로, 이후 약 270년 동안 본격적인 중건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고종 대에 복구됨.

1592년 음력 1월 1일, 전라좌수영에서 새해를 맞으며 어머니를 떠나 지내는 마음을 적은 기록. 전라좌수영은 당시 이순신이 근무하던 수군 지휘부. 나중에 출판된 《이충무공전서》 등의 내용으로 없어진 원본 부분을 보충했을 때 확인되는, 오늘날 전하는 일기의 첫 날짜.

조정이 전라·경상·충청의 수군을 통합 지휘할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고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와 겸임하도록 함. 여러 수사가 협력하던 연합작전에 통일된 지휘권을 부여한 제도적 변화였음. 한산도 진영을 중심으로 해상 방어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함대 간 명령과 작전을 조정하는 기반이 됨.

이순신이 한산도로 수군 진영을 옮겨 일본군의 해상 움직임을 감시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거점으로 삼음. 선조수정실록에는 한산도가 배를 숨기고 주둔하기에 적합하다는 이전 요청과 조정의 허락이 기록되어 있음. 해도 둔전의 설치를 추진하는 등 장기간 함대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 확보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음.

임진왜란 중 피란에서 돌아온 선조가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 시작함. 경복궁과 창덕궁 등 도성의 궁궐이 불탄 상황에서 국왕과 조정이 머물 곳을 마련한 조치. 정릉동 행궁으로 불린 이 공간이 오늘날 덕수궁으로 이어지는 출발점.

덕수궁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 해협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 수군을 격파한 전투.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큰 피해를 입은 뒤 남은 판옥선 13척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해 일본 함대의 서해 진출을 저지한 사건.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고 조선 수군의 전투 능력을 회복한 중요한 승리. 널리 쓰이는 양력 환산일은 1597년 10월 26일이나, 일부 연구·자료는 10월 25일로 표기하므로 원사료의 음력 날짜와 양력 환산 기준을 구별할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