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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1884년의 기록 59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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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가 신문과 서적을 간행할 박문국의 설치를 결정한 날로, 음력 고종 20년 7월 15일에 해당. 동문학 장교 김만식이 통리아문의 신문 발행 규정에 근거하여 중단된 사업을 다시 추진. 김인식 등 실무 인력과 일본인 고문 이노우에 가쿠고로가 참여하고 저동에 사무실·인쇄소를 마련하여, 그해 한성순보 창간을 뒷받침할 조직과 제작 기반을 구축.

조선 정부의 박문국이 1883년 10월 31일(음력 10월 1일) 《한성순보》를 창간. 열흘마다 발행한다는 의미의 순보로, 한문을 사용하고 정부 소식뿐 아니라 외국 정세와 정치·법률·과학·기술 지식도 소개. 창간사인 「순보서」에서 국내외 정보를 널리 전하고 외국 문물을 분별하여 수용한다는 취지를 제시. 관청 배포와 일반인 구독을 함께 운영했으나, 한문 해독 능력과 비용·유통망의 제약 속에 독자 확대에는 한계.

1880년대 초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 장마르탱 샤르코의 연구 환경에 참여해 최면과 히스테리 현상을 연구함. 샤르코 학파는 최면을 히스테리와 연결된 신경학적 현상으로 설명했고, 비네도 초기에는 이 해석을 지지하며 샤를 페레 등과 관련 실험을 수행함.

이 시기의 연구는 훗날 비네가 피험자의 피암시성과 실험자의 기대가 연구 결과에 개입할 수 있다는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됨. 최면 연구의 한계를 경험한 뒤 관찰과 실험 통제를 더 중시하는 연구 태도로 이동하게 되는 배경이 됨.

알프레드 비네

마르크스 사후 엥겔스가 《자본론》 제1권 독일어 제3판을 편집함. 마르크스가 남긴 독일어판의 수정 표시와 프랑스어판의 참고 지시를 대조하여, 특히 자본축적 부분의 변경 사항을 반영함.

엥겔스가 임의로 새 저작을 쓴 것이 아니라 저자의 수정 흔적과 지시를 활용한 편집 작업. 이후 영어 초판의 기본 대본으로도 사용된 판본.

자본론 제1권

일본 육군 참모본부 소속 사코가게노부가 확보한 광개토왕릉비 자료가 일본에 전해짐. 초기 자료는 글자 윤곽을 따라 그리고 먹을 채운 방식의 것이어서, 비면을 직접 뜬 원석탁본과 같은 성격의 자료로 볼 수 없음. 이후 일본의 비문 연구가 본격화되는 출발점이 되었음.

박영효가 한성부판윤에서 물러나 광주유수로 옮겨가고, 신문 준비를 돕던 유길준도 사직하면서 한성부의 간행 계획 중단. 유길준이 신문국 장정과 창간사 등을 마련하던 단계에서 추진 인력이 흩어진 상황. 일본인 협력자들도 이노우에 가쿠고로를 제외하고 귀국했으며, 이후 김만식이 통리아문을 중심으로 사업을 다시 추진.

교직을 떠나 펜실베이니아로 돌아온 타벨이 미드빌의 잡지 《쇼토콴》에서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한 언론 경력. 성인 독자의 자율학습을 돕는 교육운동과 연결된 매체에서 자료 조사와 기사 작성, 편집 실무를 익힌 시기. 다양한 주제를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는 일은 대학에서 얻은 지식을 실제 직업 능력으로 바꾸는 계기. 프랑스 혁명의 여성들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집필 과정에서 성장했으며, 안정된 편집 업무를 넘어 장기 연구와 독립 저술을 택하게 된 발판.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자오선 회의에서 그리니치 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을 경도 0도의 국제 기준으로 권고하는 결의안이 찬성 22표, 반대 1표, 기권 2표로 통과됨. 최종 회의 결의문은 10월 22일에 서명되었으며, 이 표결은 국제 항해와 지도 제작의 기준 통일을 촉진함.

19세기까지 국가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본초자오선을 사용하는 일이 많아 국제 항해와 측량, 지도 제작에 불편이 발생함. 1884년 국제 자오선 회의는 공통 본초자오선과 세계일의 기준을 논의하는 국제적 조정의 장이었음.

그리니치 본초자오선 결의안은 10월 13일 표결로 채택되었고, 10월 22일 서명된 최종 문서에 포함됨. 회의가 각국의 시간대를 일괄 설정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할 필요.

갑신정변 과정에서 박문국 사옥과 활자·인쇄시설이 소실되면서 한성순보 발행 중단. 창간 약 1년 만에 신문 제작의 물적 기반을 잃은 사건으로, 정치적 격변이 정부의 정보·출판 사업에 직접 영향을 준 사례. 이후 인쇄시설과 인력을 다시 갖추어 1886년 한성주보로 신문 간행을 재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