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동성당
장소

명동성당

Myeongdong Cathedral명동대성당종현성당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서울 명동성당

서울 중구에 있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으로, 한국 천주교를 상징하는 고딕 양식 건축물. 1898년 완공됨.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기에는 시위대의 피난처이자 농성장으로 쓰여 '민주화의 성지'로 불렸으며, 6월 항쟁 때 6·10 국민대회 이후 학생·시민의 농성이 전개된 장소.

11 타임라인
3 사실

타임라인

11
1784 1건
242년 전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명례방(현 명동)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을 지도자로 정기 신앙 집회를 염. 평신도들이 스스로 미사·교리를 나눈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앙공동체로, 오늘날 연구자들이 '명례방 공동체'로 부름. 이 김범우의 집터가 한 세기 뒤 명동성당이 들어선 자리로, 한국 천주교회가 발원한 곳으로 기억됨.

1887 1건
139년 전

조미수호조약(1882) 이후 종교의 자유를 내다본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회장 명의로 종현 일대 대지를 사들이기 시작함. 조불수호통상조약(1886) 이듬해인 1887년 5월 나머지 부지를 마저 사들여 침계 윤정현의 옛 저택 자리를 확보하고, 그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는 정지작업에 들어감. 매입·건축 비용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지원함.

1888 1건
138년 전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과 가깝고 궁궐을 내려다본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이 성당 부지의 소유권을 억류하고 공사 중단을 요구함. 1888년 4월에는 명동성당 건립을 직접적 계기로 금교령을 선포해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의 전교 활동까지 막음. 프랑스 공사가 부임해 강하게 항의한 끝에 1890년에야 분쟁이 풀려 공사 재개의 길이 열림.

1892 1건
134년 전

부지 분쟁이 풀린 뒤 옛 저택을 헐고 1892년 5월 8일 새로 부임한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정초식을 올려 본격 착공함. 설계와 공사 감독은 파리외방전교회 코스트 신부가 맡았고, 양옥 기술자가 없어 벽돌공·미장공·목수를 중국에서 데려와 공사를 진행함. 한국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 성당이 첫 삽을 뜬 시점.

1896 1건
130년 전

청일전쟁(1894)으로 중국인 인부들이 돌아가고 재정난까지 겹쳐 공사가 지체되던 중, 설계·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벽체 공사가 끝나갈 무렵인 1896년 2월 선종함. 뒤를 이어 프와넬 신부가 감독을 맡아 내부 공사를 속행함. 설계자의 죽음에도 공사가 멈추지 않고 완공까지 이어진 전환점.

1898 1건
128년 전

착공 6년 만인 1898년 5월 29일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올려 성당을 완공함. 라틴 십자형 평면에 벽돌로 쌓은 한국 최초의 순수 고딕 양식 대성당으로, 당시 가장 높은 건물이라 '뾰족집'으로 불리며 장안의 명물이 됨. 준공 당시 이름은 자리 이름을 딴 종현성당.

1945 1건
81년 전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고 성당도 종현성당·종현본당으로 불림. 1945년 광복 후 동 이름이 명동(明洞)으로 바뀌면서 성당 이름도 오늘날의 명동성당(명동본당)으로 자리잡음. 지명 변화가 성당의 통칭으로 굳어진 계기.

1976 1건
50년 전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공동 집전한 3·1절 기념미사 중, 윤보선·김대중·함석헌·문익환 등 재야 지도층이 긴급조치 철폐와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함. 정부가 이를 정권 전복 선동으로 몰아 김대중 등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하면서 이른바 '명동 사건'이 됨. 전직 대통령·정치인·종교인·교수가 함께해 흩어져 있던 재야 민주세력이 연대하는 기폭제가 됨.

1977 1건
49년 전

1977년 11월 22일 명동성당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58호로 지정됨.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 성당이라는 건축사적 가치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성을 공인받음. 이후 건물의 보존·복원 관리가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근거가 됨.

1987 2건
39년 전

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

6월 민주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박처원 은폐·축소 주도

6월 10일 국민대회 뒤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감. 인근 계성여고 학생과 시민들이 도시락·물을 전달하며 지원했고, 사제단의 중재로 6월 15일 오후 자진 해산함. 단발성으로 끝날 뻔한 6·10 국민대회를 지속적 항쟁으로 전환시킨 분기점.

그 외 사실들

발언

  • 경찰들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1987년 6월항쟁 당시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해 농성하자, 김수환 추기경이 진입을 시도하는 경찰에 맞서 남긴 말

    1987년 6월 | 출처: 위키백과 — 명동성당

기록

  • 명동성당은 사제가 상주하며 사목하는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최초로 지어진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연와조) 성당. 라틴 십자형 평면 구조이며 주보성인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임.

  •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이 운영하는 공식 홈페이지로, 본당의 역사·전례 안내·소식 등을 제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