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본이 점토층 자리에 도자기 공방을 세우고, 운영은 20대 초반의 막내아들 조셉에게 맡김. 회사는 조셉의 이름을 따 '조셉 본(Joseph Bourne)'으로 불렸고, 솔트글레이즈 스톤웨어 병·항아리를 만들며 빠르게 자리 잡음. 217년을 이어갈 덴비 포터리가 시작된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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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본, 덴비 점토층 발견·감정
벨퍼 포터리의 도공이던 윌리엄 본이 알프레턴–더비 간 유료도로 공사 중 드러난 대규모 점토층을 감정하도록 불려감. 더비셔는 점토와 석탄이 풍부해 당시 영국 도자 산업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본은 이 점토의 높은 품질을 단번에 알아봄. 이 발견이 이듬해 덴비 포터리 설립으로 이어진 출발점.
2016년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로 촛불집회가 번지자, 이에 맞서 탄핵에 반대하는 보수 진영이 태극기를 들고 집회를 열며 '태극기 집회'로 불림.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 이후에도 이어짐. 국민 통합의 상징이던 태극기가 특정 정치 진영을 대표하는 표상으로도 쓰이게 된 현상으로, 국기의 상징성을 둘러싼 논쟁을 낳음.
2002년 한일 월드컵 거리응원에서 젊은 세대가 태극기를 망토처럼 두르거나 얼굴에 그려 넣으며 응원 도구이자 패션으로 사용함. 엄숙한 숭배의 대상이던 국기를 친숙하고 즐거운 소지품으로 바꾼 변화로, 태극기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크게 달라진 분기점으로 꼽힘.
2009년 5월 서울 진관사 칠성각을 해체·복원하던 중 불단과 벽체 사이에서 1919년 무렵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태극기와 독립신문류 등이 발견됨. 일장기 위에 태극과 4괘를 덧그린 형태로,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됨. 9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이 태극기는 2010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2021년 보물로 승격됨.
2007년 1월 26일 법률 제8272호로 '대한민국국기법'이 제정·공포되고 6개월 뒤인 7월 27일부터 시행됨. 그동안 대통령령 수준의 규정으로 다뤄지던 국기의 제작·게양·관리·선양을 법률로 끌어올려 규정함. 태극기의 지위와 사용 원칙을 법으로 명문화한 현행 국기 제도의 토대.
1997년 10월 15일 태극의 빨강·파랑 등 태극기의 표준 색도가 개정되어 현행 색이 확정됨. 표준 색도에 가까운 팬톤 색으로 빨강 186C, 파랑 294C가 함께 제시됨. 그동안 모호하던 색 기준을 명확히 해 태극기 색을 통일하려는 조치.
1984년 2월 21일 대통령령 제11361호로 '대한민국국기에관한규정'을 제정함. 그동안 '국기제작법'과 '국기게양방법에 관한 건'으로 나뉘어 있던 규정을 하나로 통합해 국기의 제작·게양·관리 기준을 체계적으로 정함. 2007년 국기법 시행 전까지 태극기 사용의 기본 규범으로 기능함.
정부가 1949년 1월 국기시정위원회를 꾸려 제각각이던 태극기 규격을 통일하는 작업에 착수, 여러 안을 검토한 끝에 '우리국기보양회' 안을 채택함. 1949년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 태극과 4괘의 위치·비율 등 현행과 같은 작도법을 확정함. 오늘날 태극기 표준 도안의 직접적인 토대.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태극기를 새 나라의 국기로 공식 제정함. 다만 이때까지도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라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함께 쓰임. 대한민국 정부의 국기로서 태극기의 법적 지위가 확립된 시점.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1년 3월 16일 태극기에 조국 독립을 향한 결의를 붓글씨로 적고 서명해, 중국에서 활동하던 벨기에 신부 매우사(샤를 메우스)에게 건넴. 미국으로 건너간 매우사를 거쳐 도산 안창호 가족에게 전해졌고 1985년 독립기념관에 기증됨. 임시정부 지도자의 친필이 담긴 항일 유산으로, 2008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2021년 보물로 승격됨.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에서 전국의 시위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침. 일제가 금지한 태극기를 거리에 내건 행위 자체가 독립 의지의 표현이었고, 이를 계기로 태극기는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굳어짐. 같은 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태극기를 국기로 계승함.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로 대한제국이 국권을 잃자, 일제가 태극기의 공식 사용을 금지하고 일장기를 강요함. 공적 영역에서 사라진 태극기는 도리어 빼앗긴 국권과 민족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어, 이후 독립운동의 깃발로 되살아나는 계기가 됨.
조선의 외교고문 오언 N. 데니가 1890년 임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갈 때 고종이 그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태극기. 가로 2.6m가 넘는 큰 기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이자 초기 태극기의 형태를 보여주는 자료. 1981년 데니의 후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2021년 보물로 지정됨.
1883년 3월 6일(음력 1월 27일) 고종이 왕명으로 태극·4괘 도안의 태극기를 조선의 정식 국기로 제정·공포함.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국기를 이미 제정하였으니 팔도와 사도에 알려 사용하게 하자'고 아뢰자 윤허하여 전국에 반포됨. 태극기가 개인의 사용을 넘어 국가가 공인한 공식 국기로 자리 잡은 출발점.
제물포 조약 사후 처리를 위한 제3차 수신사 박영효 일행이 일본으로 가던 1882년 9월, 증기선 메이지마루 선상에서 태극·4괘 도안의 기를 직접 그려 사용함. 오랫동안 '최초의 태극기'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넉 달 앞선 이응준의 기를 변형해 4괘의 좌우를 바꿔 쓴 것으로 밝혀짐. 국가 사절이 외국에서 공식적으로 게양한 이른 사례로, 태극기가 대외적으로 조선을 대표하기 시작한 장면.
미국 측이 조약 체결에 쓸 국기를 요청하자, 김홍집의 지시를 받은 역관 이응준이 제물포에 정박한 미군함 안에서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를 그린 기를 제작·사용함.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조인 자리에서 쓰인 이 기는 오늘날 학계가 보는 '최초의 태극기'로, 조선이 근대 국가로서 처음 자국 국기를 내건 사례. 박영효의 기와 함께 태극기 기원 논의의 중심에 있음.
1923년 국기의 날 회의에서 68개 단체가 마련한 국기 예법(National Flag Code)이 1942년 공법 77-623호로 연방 법률이 됨. 국기의 게양·취급·경례 방식을 규정했으며, 나치 경례와 닮았다는 이유로 '벨러미 경례'를 빼고 가슴에 손을 얹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 대표적 변화임. 성조기에 대한 예우가 국가 차원에서 제도화됨.
미국의 Flag Code
성조기를 “어떻게 대하고, 언제·어디에·어떤 방식으로 게양할 것인가”를 정한 연방 차원의 예절 규범. 현재는 주로 미국 연방법전 제4편 제1장 (U.S. Code Title 4, Chapter 1 — The Flag)에 들어 있음. 원문은 미 하원 법령 사이트에서 볼 수 있음.
핵심 성격
가장 중요한 점은, Flag Code는 대부분 민간인을 강제로 처벌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따르는 예절 지침’에 가깝다는 것. 의회조사국 CRS도 Flag Code에는 일반적인 불이행에 대한 처벌 조항이나 집행 규정이 없고, 민간인·민간단체가 따를 수 있는 가이드로 기능한다고 설명.
즉, “성조기를 땅에 닿게 했다”, “밤에 조명 없이 걸어두었다”, “의류 디자인에 성조기 무늬를 썼다” 같은 행위가 Flag Code의 정신에는 어긋날 수 있지만, 그 자체로 곧바로 연방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 구조는 아님. 다만 군대, 정부기관, 학교, 의전 행사 등에서는 별도의 규정이나 관행이 더 엄격하게 적용될 수 있음.
역사
현대적 의미의 Flag Code는 1923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National Flag Conference에서 여러 민간·애국단체가 성조기 예절을 정리한 데서 출발. 이후 1942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관련 공동결의에 서명하면서 연방법으로 성문화되었고, 1998년에는 기존 Title 36에서 현재의 Title 4로 재편입.
NFL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 쿼터백 콜린 캐퍼닉이 인종차별과 경찰 폭력에 항의하며 프리시즌 경기 전 국가 연주 때 기립을 거부하고 벤치에 앉음(이후 9월 1일부터 무릎 꿇기로 전환). '무릎 꿇기' 시위가 스포츠계 전반으로 번지며, 국기·국가에 대한 경의와 표현의 자유·인종 정의를 둘러싼 격렬한 사회 논쟁을 촉발함.
9·11 테러 당일 뉴욕 소방관 세 명이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잔해 위에 성조기를 세웠고, 사진기자 토머스 E. 프랭클린이 이 장면을 촬영함. 이오지마 사진에 비견된 이 이미지는 다음 날 신문 1면을 장식하며 미국의 회복과 단결을 상징하게 됨. 9·11 이후 성조기 판매가 급증하고 집·자동차에 국기를 다는 물결이 일며, 성조기가 국가적 애도와 결속의 표상으로 다시 부각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