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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건

착공 6년 만인 1898년 5월 29일 조선대목구장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올려 성당을 완공함. 라틴 십자형 평면에 벽돌로 쌓은 한국 최초의 순수 고딕 양식 대성당으로, 당시 가장 높은 건물이라 '뾰족집'으로 불리며 장안의 명물이 됨. 준공 당시 이름은 자리 이름을 딴 종현성당.

명동성당

1977년 11월 22일 명동성당이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258호로 지정됨. 한국 최초의 본당이자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 성당이라는 건축사적 가치와 한국 천주교회의 상징성을 공인받음. 이후 건물의 보존·복원 관리가 국가 차원에서 이뤄지는 근거가 됨.

북경에서 조선인 최초로 영세를 받고 돌아온 이승훈이 명례방(현 명동) 역관 김범우의 집에서 이벽을 지도자로 정기 신앙 집회를 염. 평신도들이 스스로 미사·교리를 나눈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신앙공동체로, 오늘날 연구자들이 '명례방 공동체'로 부름. 이 김범우의 집터가 한 세기 뒤 명동성당이 들어선 자리로, 한국 천주교회가 발원한 곳으로 기억됨.

명동성당

조미수호조약(1882) 이후 종교의 자유를 내다본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 주교가 '김가밀로'라는 한국인 회장 명의로 종현 일대 대지를 사들이기 시작함. 조불수호통상조약(1886) 이듬해인 1887년 5월 나머지 부지를 마저 사들여 침계 윤정현의 옛 저택 자리를 확보하고, 그해 겨울부터 언덕을 깎는 정지작업에 들어감. 매입·건축 비용은 파리외방전교회가 지원함.

명동성당

역대 왕의 어진을 모신 영희전과 가깝고 궁궐을 내려다본다는 이유로 조선 조정이 성당 부지의 소유권을 억류하고 공사 중단을 요구함. 1888년 4월에는 명동성당 건립을 직접적 계기로 금교령을 선포해 천주교는 물론 개신교의 전교 활동까지 막음. 프랑스 공사가 부임해 강하게 항의한 끝에 1890년에야 분쟁이 풀려 공사 재개의 길이 열림.

부지 분쟁이 풀린 뒤 옛 저택을 헐고 1892년 5월 8일 새로 부임한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정초식을 올려 본격 착공함. 설계와 공사 감독은 파리외방전교회 코스트 신부가 맡았고, 양옥 기술자가 없어 벽돌공·미장공·목수를 중국에서 데려와 공사를 진행함. 한국 최초의 대규모 고딕 양식 벽돌 성당이 첫 삽을 뜬 시점.

명동성당

청일전쟁(1894)으로 중국인 인부들이 돌아가고 재정난까지 겹쳐 공사가 지체되던 중, 설계·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벽체 공사가 끝나갈 무렵인 1896년 2월 선종함. 뒤를 이어 프와넬 신부가 감독을 맡아 내부 공사를 속행함. 설계자의 죽음에도 공사가 멈추지 않고 완공까지 이어진 전환점.

명동성당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는 명치정(明治町)으로 불렸고 성당도 종현성당·종현본당으로 불림. 1945년 광복 후 동 이름이 명동(明洞)으로 바뀌면서 성당 이름도 오늘날의 명동성당(명동본당)으로 자리잡음. 지명 변화가 성당의 통칭으로 굳어진 계기.

10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6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함. 경찰의 원천봉쇄로 대회장에는 소수만 참여했으나, 오후 6시를 기해 차량 경적과 흰 손수건 흔들기 등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이 동참함. 6월 항쟁의 본격적 시작을 알린 날로, 이날 밤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짐.

국본은 6·10 대회를 앞두고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에 맞춰 차량 경적을 울리고 흰 손수건을 흔드는 평화적 시위 지침을 내림. 경찰이 대회장인 성공회대성당을 봉쇄하자 시위는 도심 전역으로 번졌고, 택시·버스 기사들의 경적과 회사원들의 호응이 잇따름. 한편 같은 날 민정당은 잠실체육관 전당대회에서 노태우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해, 정권의 호헌 의지와 국민의 직선제 요구가 정면으로 충돌한 상징적 하루가 됨.

6월 민주항쟁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던 이한열은 교문 앞에서 독재 타도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가두시위를 하던 중 전투경찰이 쏜 SY-44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짐. 당시 그가 피를 흘리며 동료 학생(박남식 씨 등)에게 부축되어 쓰러지는 장면은 외신기자(정태원 씨)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 세계에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알림. 이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며 6월 민주 항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됨.

7월 5일 끝내 숨진 이한열의 장례가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짐. 연세대 영결식에 이어 서울시청 앞 노제에 100만 명이 모였고, 운구 행렬은 광주 망월묘지공원 안장으로 이어짐. 6월 항쟁의 희생을 상징하는 추모 물결 속에 약 한 달간의 항쟁이 마무리된 날.

연세대생 이한열, 6월 항쟁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사망. 장례식에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모이며 민주화 열기를 더욱 확산시킴.

국본이 무차별 최루탄 사용에 항의해 6월 18일 '최루탄추방 국민대회'를 전국에서 개최함. 전국 주요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부산에서는 노동자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 6월 24일 사망함. 회사원·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며 학생 시위가 시민 항쟁으로 확산된 분수령.

6월 민주항쟁

6월 10일 국민대회 뒤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감. 인근 계성여고 학생과 시민들이 도시락·물을 전달하며 지원했고, 사제단의 중재로 6월 15일 오후 자진 해산함. 단발성으로 끝날 뻔한 6·10 국민대회를 지속적 항쟁으로 전환시킨 분기점.

민주정의당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같은 날 열린 국본의 6·10 국민대회와 정면으로 대비되며, 정권의 권력 승계 의지를 드러낸 행사. 이후 노태우는 6·29 선언을 거쳐 그해 12월 직선제 대선에서 당선됨.

6월 민주항쟁

전두환이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가 열린 4월 13일 특별담화를 통해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현행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함.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이 조치는 '4·13 호헌조치'로 불림. 발표 당일부터 각계각층의 반대 투쟁이 터져 나와 6월 항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됨.

1985년 2·12 총선 이후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지자 여야는 국회 개헌특위를 두고 협상했으나 난항을 거듭함. 전두환은 이를 빌미로 4월 13일 개헌 논의를 빙자한 분열과 혼란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며 임기 중 개헌 유보와 현행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선언함. 직선제를 바라던 국민의 열망에 정면으로 배치된 조치로, 대학교수·종교계·법조계의 잇따른 시국선언과 단식·농성을 촉발함.

박종철군 49재에 맞춰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에서 전개됨. 경찰이 도심 건물 옥상까지 봉쇄했으나 각지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 교도소 양심수들은 단식으로 호응함. 2·7 추도대회와 더불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동력을 다진 행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