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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5월 18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열린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함. 김승훈 신부가 낭독한 성명은 경찰이 발표한 고문 가담자가 2명이 아니라 5명이었으며,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과 유정방·박원택 등 대공수사 간부가 사건 축소·조작에 관여했다고 폭로함.

진실은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이부영에게 전달된 뒤, 안유 보안계장과 한재동 교도관, 재야 인사 김정남 등을 거쳐 사제단에 전해짐. 정권이 물고문 사실을 감추고 일부 경찰관만 희생양으로 내세워 사건을 종결하려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확인된 것임.

폭로 직후 박종철 사건은 다시 전국적 쟁점으로 떠오름. 4·13 호헌조치 반대와 고문·은폐 규탄이 결합하면서 6월항쟁으로 이어지는 범국민적 저항이 확대됨.

야당과 재야·종교계 등이 서울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함. 국본은 전두환의 4·13 호헌조치 철회와 민주헌법 쟁취를 공동 목표로 삼고, 노태우의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일인 6월 10일에 전국적인 국민대회를 열기로 함. 각 분야와 지역의 민주화 요구를 공동행동으로 연결하여 6월항쟁의 조직적 구심점이 된 연합체였음.

전두환 6월 민주항쟁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경찰들이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을 불법연행한 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추궁하며 물고문을 가해 사망에 이르게 함. 경찰은 사인을 단순 쇼크사로 설명했으나 언론 취재와 의료진의 소견 등이 고문 의혹을 드러냈음. 사건은 전국적인 추모와 고문 규탄운동을 촉발했으며, 이후 가해 경찰의 범위와 은폐 사실이 추가로 밝혀지면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을 증폭시킨 계기가 되었음.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12·12 군사반란·5·18 내란 및 비자금 사건 상고심에서 전두환의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 노태우의 징역 17년과 약 2,628억 원 추징을 확정함. 군사반란과 내란으로 집권한 뒤 헌법 개정과 통치를 이어갔더라도 그 폭력적 정권 장악이 정당화되지 않는다는 다수의견을 제시함.

광주시민의 저항은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판단함. 내란의 종료 시점은 항소심이 본 1987년 6·29 선언이 아니라 비상계엄이 해제된 1981년 1월 24일로 보면서도 원심의 형량은 유지함.

전두환

전두환 정부의 동력자원부가 대한석유공사 민영화에 따른 지분 인수기업으로 선경을 선정했다고 발표함. 미국 걸프사의 철수에 뒤이은 조치로, 선경은 같은 해 12월 지분 50%와 경영권을 인수해 섬유 중심 기업에서 석유·화학 분야로 사업을 확대함.

정부는 산유국과의 관계를 통한 원유 확보 능력과 자금 조달 등을 선정 이유로 제시함. 선경의 유공 인수는 그룹의 석유·화학사업 확대와 수직계열화의 토대가 되었으며, 11월의 선정 발표에 이어 12월 인수와 경영진 교체가 이루어짐.

전두환 당시 대통령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6·10국민대회를 앞두고 열린 시위에서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쓰러짐. 중태에 빠진 이한열의 모습은 시위 진압의 폭력성을 드러내며 학생과 시민의 분노를 확대했고, 다음 날 시작되는 전국적 항쟁에 큰 영향을 주었음. 이한열은 7월 5일 사망했으며, 7월 9일 장례에는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모여 민주화 요구와 국가폭력에 대한 항의를 이어갔음.

전두환 6월 민주항쟁

전두환이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향년 90세로 사망함. 회고록 사자명예훼손 사건의 항소심과 거액의 추징금 환수 문제가 남아 있었으며, 정부는 국가장을 치르지 않기로 하고 유족은 가족장을 진행함.

1988년 대국민 사과와 이후 일부 책임·유감 표명은 있었으나, 5·18 진압 지휘의 구체적 책임은 계속 부인함. 사망에 따라 형사재판은 종결 절차에 들어갔고, 회고록 민사소송과 생전 집행된 재산을 둘러싼 다툼은 이후에도 이어짐.

전두환

전두환 대통령이 특별담화에서 임기 안의 개헌 논의를 중단하고 기존 제5공화국 헌법에 따른 간접선거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함. 서울올림픽 준비와 정부 이양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야당과 시민사회가 요구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거부한 조치였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분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각계의 호헌 반대 움직임을 촉발하여 6월 민주항쟁의 주요 배경이 되었음.

1985년 2·12 총선 이후 직선제 개헌 요구가 커지자 여야는 국회 개헌특위를 두고 협상했으나 난항을 거듭함. 전두환은 이를 빌미로 4월 13일 개헌 논의를 빙자한 분열과 혼란을 더는 방치할 수 없다며 임기 중 개헌 유보와 현행 헌법에 의한 정부 이양을 선언함. 직선제를 바라던 국민의 열망에 정면으로 배치된 조치로, 대학교수·종교계·법조계의 잇따른 시국선언과 단식·농성을 촉발함.

전두환 호헌조치 발표 6월 민주항쟁

경찰이 1985년 9월 4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전 의장 김근태를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해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가혹행위를 가함. 김근태는 9월 26일 검찰로 송치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9일 첫 공판에서 고문 경위와 후유증을 공개 진술하고 법원에 조사를 요구함.

가족과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은 김근태의 소재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관을 찾아다녔고, 고문 피해는 인재근 등을 통해 국내외 언론과 인권단체에 알려짐. 이후 이근안 등 수사관들에 대한 형사절차와 국가배상소송, 김근태 본인의 재심으로 이어짐. 전두환 정권 시기 수사기관의 고문과 용공조작을 공론화한 대표적인 인권침해 사례.

김근태는 대공분실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반복적으로 당했으며, 이후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직접 진술함. 남영동 고문실태 조사 자료에도 1985년 9월 4일 연행과 9월 26일 검찰 송치, 전기·물고문 피해 및 이후 재판 과정이 기록돼 있음.

가족과 민주화운동 관계자들은 김근태의 소재와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수사기관을 찾아다녔고, 고문 피해 사실은 인재근 등을 통해 국내외 언론과 인권단체에 알려짐. 이후 이 사건은 수사관들에 대한 형사절차, 국가배상소송, 김근태 본인의 재심으로 이어짐.

전두환 김근태 이근안 고문 가해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와 중앙군사위원회가 김정일의 당 총비서 추대를 공식 발표함. 김일성 사망 뒤 약 3년간 이어진 권력 승계 과정에서 당 최고 직책을 공식적으로 승계한 사건으로, 북한의 세습 권력체제가 제도적으로 굳어지는 주요 분기점이 됨.

미국 시카고 디코븐가 일대에서 시작된 화재가 강풍과 건조한 날씨 속에 급속히 확산되어 도심 약 3.5제곱마일과 1만 8천여 채의 건물을 파괴함. 약 300명이 사망하고 인구의 3분의 1가량이 집을 잃었으며, 이후 시카고의 도시 재건과 내화 건축·도시계획의 발전을 촉진한 대재난.

몬테네그로가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하며 제1차 발칸 전쟁이 시작됨. 이후 불가리아·세르비아·그리스가 전쟁에 가세하면서 발칸동맹과 오스만 제국의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발칸반도의 세력 균형과 오스만 제국의 유럽 영토에 큰 변화를 초래한 전쟁의 출발점이 됨.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 수비대·공사관원·낭인 등이 경복궁을 습격해 명성황후를 시해함. 삼국간섭 이후 조선 조정에서 친러 세력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일본이 영향력 회복을 꾀하며 자행한 사건으로, 이후 을미의병과 아관파천으로 이어지는 정세 변화의 중요한 배경이 됨.

경복궁 건청궁 단발령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무자파라바드 북북동쪽에서 규모 7.6의 강진이 발생함. 파키스탄 북부와 인도령 카슈미르에서 건물 붕괴와 대규모 산사태가 이어지며 8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광범위한 이재민이 발생한 재난.

동로마 제국 비티니아의 칼케돈에서 제4차 보편 공의회가 개막함. 에우티케스 논쟁을 비롯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 문제와 교회 규율·관할권을 다루며 이후 기독교 교리와 교회 분화에 장기적 영향을 남긴 회의의 시작.

《쇼크 트룹스》(Un homme de trop)의 프랑스 개봉. 1943년 프랑스 세벤 지방에서 레지스탕스가 사형수 12명을 구출하려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열세 번째 남자까지 데려오면서 벌어지는 전쟁 드라마. 장피에르 샤브롤의 소설을 바탕으로, 유죄가 입증되지 않은 사람을 처형해도 되는지를 둘러싼 집단의 도덕적 갈등을 다룬 작품.

코스타 가브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