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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사령관과 육군 정보학교장 등 요직을 거친 노상원이 2018년 국군의 날 행사 교육생인 여군을 성추행해 보직 해임되고 입건됨. 이 사건으로 그해 불명예 전역했으며, 이후 경기도 안산에서 무속인(점집)으로 생활함. 현역에서 물러난 민간인 신분이 훗날 12·3 비상계엄 개입의 배경으로 거론됨.

  • 납치 직후 CIA 도쿄 지부와 서울 지부는 긴밀히 소통하며 중앙정보부의 개입을 확신. 특히 한국 공작선 '용금호'가 김대중을 태우고 오사카항을 출발해 한국으로 향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
  • 당시 필립 하비브 주한 미국 대사는 CIA의 보고를 받은 뒤, 박정희 정권에 "김대중이 죽는다면 한미 관계는 끝장"이라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를 보냄. 미국은 김대중의 '생존 확인'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함.
  • 납치범들이 바다에 김대중을 수장하려 할 때, 미국 정찰기가 용금호 상공을 비행하며 위협했다는 증언 있음.
김대중 납치 사건

3·1 운동 이후 고향 충남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 중이던 유관순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함. 모진 고문과 열악한 수감 환경 속에서도 독립 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며, 사망 당시 나이는 17세였음.

유관순의 순국은 3·1 운동의 희생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상징적 장면으로 기억됨. 이후 유관순은 학생 독립운동가이자 여성 독립운동가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으며, 삼일절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설명할 때 함께 언급되는 핵심 인물이 됨.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중앙기념식이 열림. 문재인 대통령 내외와 독립유공자, 일본군 위안부·강제동원 피해자 등 각계 인사와 시민 약 1만 명이 참석함. 100년 전 만세의 함성을 기리며 3·1운동의 의미를 되새긴 대규모 국가 기념행사.

삼일절

대한민국 정부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공포해 3·1절을 4대 국경일의 하나로 공식 지정함. 이로써 3·1절은 제헌절·광복절·개천절과 함께 국가가 기리는 국경일이자 공휴일이 됨. 광복 이후 대한민국이 3·1운동의 정신을 국가 차원에서 계승·기념하는 법적 토대가 마련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3·1독립선언 1주년을 맞아 첫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함. 임시정부 주최 기념식과 교민단 주최 축하식, 시가행진·기념공연 등이 열렸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은 이날을 '국경일'로 부르며 경축함. 임시정부 시기 3·1절의 정식 명칭은 '독립선언일'이었으며, 이날이 해마다 기념되는 민족 명절로 자리 잡는 출발점이 됨.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이끄는 군경이 경기도 화성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가둔 뒤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학살함. 이 사건으로 28명이 목숨을 잃고 인근 마을을 포함해 30여 채의 집이 불탐.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3·1운동 탄압의 대표적 참상.

3·1운동으로 분출된 독립 열망을 이어받아, 중국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핵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함. 군주국이 아닌 국민주권의 공화국을 표방한 한국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 3·1운동의 가장 큰 정치적 결실로 평가됨.

삼일절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이 고향인 충남 천안 병천(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유중권 등과 함께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 시위를 주도함. 일제 헌병의 발포로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가 부상함. 유관순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이듬해 옥중에서 순국, 3·1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음.

유관순 삼일절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평양·진남포·의주 등 북부 도시를 거쳐 전국 거의 모든 군으로 번지며 약 두 달간 이어짐. 학생·농민·노동자·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고, 만주·연해주·미주 등 국외 한인 사회로도 시위가 확산됨. 신분과 지역을 넘어선 거족적 항쟁으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기록됨.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자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크게 고조됨. 고종의 국장(인산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며칠 뒤 3·1운동이 폭발하는 사회적 배경이 됨.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섬. 비폭력 만세 시위로 시작된 이날의 선언이 전국으로 번지는 3·1운동의 출발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