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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

1948 20건
78년 전

1948년 5월 6일 통위부 특명 제52호에 따라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인사. 후임 박진경은 중령으로 취임한 뒤 대령으로 진급한 지휘관.

김익렬이 전날 군정 수뇌회의에서 선무·귀순공작과 경찰 통합지휘를 주장하고 조병옥과 충돌한 뒤 이루어진 교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를 5·10선거를 앞두고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려는 군정 수뇌부의 정책 전환과 연결하여 설명한 내용. 회의 중 충돌만을 유일한 사유로 명시한 인사문서가 확인된 것은 아니며, 연대장직 해임을 군에서의 파면이나 제적으로 확대해서는 안 되는 인사 구분.

후임 박진경의 지휘 아래 진압작전이 확대되고 뒤이어 제11연대 편제로 이어진 부대 개편. 5월 6일의 연대장 교체와 이후의 부대 개편은 서로 구분되는 과정.

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김익렬 제9연대장 등이 참석한 수뇌회의. 딘 일행의 이날 제주 방문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전한 당시 신문 보도로도 확인되는 일정.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인용한 김익렬의 회고에 따르면, 김익렬은 무력에 의한 위압과 선무·귀순공작을 병용하고 무장세력과 일반 주민을 구분하며 경찰을 통합 지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입장. 조병옥의 강경 진압 주장과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맞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는 구체 경위는 김익렬의 회고 증언.

김익렬은 다음 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경과. 당시 방문 보도, 당사자의 후대 회고, 공식보고서의 정책 전환 해석을 서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하는 사건.

1948년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가옥이 불에 탄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앞선 무장대의 우익계 인사·가족 납치와 살해, 장례식 뒤 우익청년단원들의 방화, 이어진 무장대의 청년단 추격과 경찰 출동을 구분하여 서술하고, 가옥 방화는 우익청년단원들의 행위로 판단한 내용.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김익렬 제9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거쳐 경찰의 후원 아래 우익청년단체가 불을 질렀다고 판단하여 보고한 경위. 당시 경찰은 무장대 소행이라고 보고했으며, 김익렬의 조사 결과와 미군정 측 대응의 구체 경위는 그의 회고와 관계자들의 후대 증언을 함께 토대로 정리된 내용.

불타는 마을을 공중과 지상에서 촬영한 미군 영상 《제주도의 메이데이》가 남아 있는 사건. 공식보고서는 이 영상의 구성과 무장대 책임론을 강경 진압 정당화의 맥락에서 분석한 내용이며, 영상의 존재만으로 미군이 방화를 사전에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입증되는 것은 아닌 자료적 한계. 4월 말 협상이 이행되지 못한 과정의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공격 명령과 지휘관 교체까지 이어진 정책 변화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경위.

당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거주하던 대동청년단 단원의 부인 2명은 마을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제주시 읍내로 피신. 이들은 살림살이를 챙기기 위해 잠시 마을로 다시 들어왔다가, 이를 인지한 마을 주민들(무장대 동조 세력)에 의해 납치. 마을 뒷산인 민오름으로 끌려가 이 중 1명은 사망.

이들은 이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기록. 당시 오라리 지역은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과 좌익 무장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곳. 이 방화사건은 평화회담을 깨고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무장대 측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 단체의 충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피해를 양산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기록.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이 대정면 구억리에서 만나 무력 충돌의 중단과 무장대의 하산 방안을 협의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가 1948년 4월 28일로 정리한 회담.

김익렬의 회고를 인용한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합의의 주요 내용은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산발적 충돌은 연락 미달로 간주하되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 위반으로 보며, 무장해제는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약속이 깨지면 전투를 재개하며,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내용.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 날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서귀포·성산포 등으로 확대하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하는 구상. 서명된 합의문 원본이 아니라 김익렬의 회고에 따라 전해지는 구체 조항.

회담 뒤에도 납치·살해와 5월 1일 오라리 방화, 군정 수뇌부의 공격 방침 등이 이어지며 지속적인 충돌 중단으로 연결되지 못한 협상. 한편 박찬식의 연구는 1948년에 작성·발표된 김익렬의 《참전기》에 회담일이 4월 30일로 적혔다고 지적한 내용으로, 공식 연표의 4월 28일과 날짜 기록의 차이가 남아 있는 사건.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무장대에 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보도의 ‘지난 22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항공 살포일을 4월 22일로 정리한 내용.

《남선신문》 5월 3일자 《靈峰漢拏의 死火山鳴動》 역시 약 일주일 동안 산기슭 일대에 수차례 전단을 뿌렸으며, 향토의 평화 회복을 위해 손을 잡자는 취지의 김익렬 연대장 전단이 다시 살포됐다고 보도한 기록. 이 기사의 5월 3일은 발행일이고 머리말의 통신 발신일은 5월 2일로, 전단 살포 당일과 구분되는 날짜. 협상 권고와 귀순 요구가 이어진 과정에 관한 당시 보도.

김규식, 1948년 4월 21일 원세훈 등 민족자주연맹 대표단을 이끌고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이동.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전체회의에는 참석하지 않고 김구·김일성·김두봉과 남북 지도자 회담을 진행하며 남북한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을 막고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방안을 협의함.

남북 지도자들은 외국군 철수, 철수 이후 전조선 정치회의 소집, 단독정부 수립 반대, 내전 방지 등에 합의했으나 이를 실행할 제도적 수단을 마련하지 못함. 김규식은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으며, 남북협상은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지는 못했지만 분단에 반대한 정치세력의 대표적인 통일정부 수립 시도로 남음.

김규식 (우사)

게토 봉기 5주년에 바르샤바의 옛 게토 지역에서 게토 영웅 기념비가 제막됨. 나탄 라포포르트의 조각은 무장 저항과 강제이송의 경험을 서로 다른 면에서 드러냄.

이 기념비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대인의 저항을 기억하는 중심 장소가 됨. 이후 생존자와 시민의 추모, 국제적인 방문과 화해의 상징적 행동이 이어짐.

바르샤바 게토 봉기

1948년 4월 19일부터 열리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으로 향함. 회의 뒤 김구, 김규식 등이 5월 초 서울로 돌아온 것과 달리 이극로는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북에 잔류함. 이로써 평생을 바친 한글운동의 무대를 남에서 북으로 옮긴 전환점.

세계보건기구 설립한 날을 세계 보건의 날 (World Health Day)로 지정. 매년 전 세계 핵심적인 보건 문제를 선정, 이를 위해 한 해 동안 국제적, 지역적, 지방적 행사를 조직하기 위해 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