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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렬

1948 20건
78년 전

전 제9연대장 김익렬의 《동족의 피로 물드린 제주참전기》가 산업신문에 1948년 8월 6일부터 8일까지 연재된 기록. 현재의 국제신문이 당시 기고문을 2019년 재수록하면서 확인한 게재 기간이며, 제주4·3평화재단 교육자료에도 8월 6일자 글로 인용된 기록.

사건 직후 현역 군인 신분으로 발표한 글이라는 점에서 예편 뒤 작성한 《4·3의 진실》 유고와 구분되는 자료. 후대 연구가 협상 날짜 등 두 기록의 차이를 검토하는 데 활용한 당사자 기록.

서울 중앙청 앞 광장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의 취임식이 열림. 7월 20일 국회에서 선출된 뒤 열린 취임식으로, 8월 15일의 정부 수립 선포와는 별개의 절차임.

이승만은 취임사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책임, 정부 조직, 국가 재건과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설명했음. 헌법과 국회에 근거한 신생 정부의 출범이라는 의미가 있었으나, 남북을 포괄하는 통일정부가 성립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취임이었음.

김구와 김규식, 남북협상에 참여한 정당·사회단체를 중심으로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 남북한에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상황에서 외세 의존을 배제하고 남북협상을 통한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을 계속 추진한다는 방침을 표방. 남북협상의 성과와 합의를 이어가기 위한 정치적 연대기구로 활동함.

김규식 (우사) 공동 결성 지도자

제헌헌법에 따라 국회가 무기명투표로 초대 대통령과 부통령을 선출함. 대통령 선거에는 재적의원 198명 중 196명이 참여해 이승만이 180표, 김구가 13표, 안재홍이 2표를 얻었고 무효표는 1표였음.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됨.

부통령 선거는 출석 197명 가운데 1차 투표에서 이시영이 113표를 얻었으나 당선에 필요한 득표수에 미달해 다시 투표했으며, 2차 투표에서 133표를 얻어 당선됨. 당시에는 별도 후보자 등록 없이 의원이 이름을 적는 방식이어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불참 의사를 밝힌 김구에게도 표가 나왔음. 선출일은 7월 20일, 정·부통령 취임식은 7월 24일이며 정부 수립 선포는 8월 15일로 구별됨.

대통령 선거 결과는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무효 1표로 총 196표임. 서재필을 적은 1표는 외국 국적 취득을 이유로 무효 처리됨.

부통령 선거 1차 투표는 이시영 113표, 김구 65표, 조만식 10표, 오세창 5표, 장택상 3표, 서상일 1표였음. 2차 투표에서 이시영 133표, 김구 62표, 그 밖의 인물 1표, 무효 1표가 나왔음. 이시영의 133표는 첫 투표 결과가 아니라 당선이 결정된 두 번째 투표의 결과임.

제헌국회가 의결한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을 국회의장 이승만이 서명·공포하고 같은 날 시행한 사건. 헌법안의 국회 의결일은 7월 12일이며, 헌법 제정·공포를 기념하는 제헌절은 7월 17일로 구분되는 연혁.

유진오와 행정연구위원회의 공동안을 심의 원안으로, 권승렬안을 참고안으로 삼아 만든 전문과 10장 103조의 국가 기본법.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 국민의 자유권과 사회적 기본권, 단원제 국회, 대통령·부통령, 사법기관 등을 규정한 국가 운영의 설계.

초안의 의원내각제 구상이 이승만의 대통령제 주장과 조정되면서 대통령중심제에 국무총리제 등의 내각제 요소를 결합한 체제. 대통령과 부통령을 국회가 선출하고 4년 임기에 한 차례 중임을 허용한 방식. 정부 수립에 앞서 국가기관을 구성할 법적 근거를 마련한 헌정의 시작.

이승만 대한민국 헌법

1948년 7월 12일 대한민국 제헌국회가 태극기를 새 나라의 국기로 공식 제정함. 다만 이때까지도 '흰 바탕에 태극과 4괘'라는 원칙만 있을 뿐 통일된 작도법이 없어 다양한 규격의 태극기가 함께 쓰임. 대한민국 정부의 국기로서 태극기의 법적 지위가 확립된 시점.

전날 진급 축하연에 참석해 술을 마신 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중 새벽에 총탄에 맞아 살해당함.

1948년 6월 7일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드바르트 베네시가 대통령직에서 사임. 같은 해 2월 공산당의 권력 장악 이후 새 공산당 주도 헌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던 베네시는 정치적 압박과 건강 악화 속에 퇴임함. 그의 퇴임은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의회민주주의가 공산당 일당지배 체제로 바뀌는 과정의 중요한 단계임.

1948년 5월 국제결제은행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제국은행으로부터 받은 금 가운데 벨기에·네덜란드 중앙은행에서 약탈된 것으로 밝혀진 약 3.7톤을 연합국의 통화용 금 반환위원회에 인도하기로 합의. 독일 제국은행이 금의 출처를 감추기 위해 녹여 재주조했던 사실은 종전 후 조사로 드러난 내용.

같은 과정에서 미국 당국이 BIS 자산 동결을 해제하고 1944년 브레턴우즈 회의의 BIS 청산 결의를 적용하지 않기로 합의. BIS는 전후 유럽 중앙은행 협력과 다자 결제 업무에 중심을 두며 존속.

김규식, 남북협상을 마치고 귀환한 뒤 5·10 총선거에 대해 반대하지도 참여하지도 않았다는 ‘불반대·불참가’ 입장을 표명. 남한 단독정부 수립 과정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선거를 물리적으로 저지하는 노선과는 거리를 둠. 이후 제도권 정부 수립 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았으나 김구와 함께 통일정부 수립운동을 계속함.

김규식 (우사)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북제주군 갑, 을의 투표가 원만히 시행되지 못하여, 군정장관에게 무효선포를 건의. 결국 무효 처리됨

  • 북제주군 갑구: 73투표구 중 31개구 투표 (등록유권자 27,560명 투표자 11,912명)
  • 북게주군 을구 -61투표구 중 32개구의 투표 (등록한 유권자 20,917명, 투표자 9,724명)

선거 후 이날까지 제주도의 선거결과만이 국회선거위원회에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고 함.

1948-05-10 event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곳 무효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남한 지역에서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됨. 남한에 배정된 200개 의석 가운데 제주 4·3의 영향으로 선거가 무효가 된 북제주 갑·을을 제외하고 198명의 의원이 선출됨. 이승만은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당선되었고, 5월 31일 열린 국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됨.

소련이 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부하면서 남북 총선거가 실현되지 못하자 유엔소총회는 선거 가능 지역에서의 선거를 권고했음.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이를 지지했지만 김구·김규식 등은 분단 고착을 우려해 남북협상을 추진했고, 좌익세력도 단독선거에 반대했음. 총선거는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통일정부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치러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