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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6월 10일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함. 경찰의 원천봉쇄로 대회장에는 소수만 참여했으나, 오후 6시를 기해 차량 경적과 흰 손수건 흔들기 등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시민이 동참함. 6월 항쟁의 본격적 시작을 알린 날로, 이날 밤 명동성당 농성으로 이어짐.

6월 민주항쟁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이던 이한열은 교문 앞에서 독재 타도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 가두시위를 하던 중 전투경찰이 쏜 SY-44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쓰러짐. 당시 그가 피를 흘리며 동료 학생(박남식 씨 등)에게 부축되어 쓰러지는 장면은 외신기자(정태원 씨)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전 세계에 군사정권의 폭력성을 알림. 이 사건은 전 국민의 분노를 일으키며 6월 민주 항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이 됨.

연세대생 이한열, 6월 항쟁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뒤 사망. 장례식에 대규모 추모 인파가 모이며 민주화 열기를 더욱 확산시킴.

국본이 무차별 최루탄 사용에 항의해 6월 18일 '최루탄추방 국민대회'를 전국에서 개최함. 전국 주요 도시에서 100만 명 이상이 참여했고, 부산에서는 노동자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뒤 6월 24일 사망함. 회사원·이른바 넥타이부대까지 가세하며 학생 시위가 시민 항쟁으로 확산된 분수령.

6월 민주항쟁

6월 10일 국민대회 뒤 시위를 벌이던 학생·시민이 경찰에 쫓겨 명동성당으로 들어가 6월 15일까지 농성을 이어감. 인근 계성여고 학생과 시민들이 도시락·물을 전달하며 지원했고, 사제단의 중재로 6월 15일 오후 자진 해산함. 단발성으로 끝날 뻔한 6·10 국민대회를 지속적 항쟁으로 전환시킨 분기점.

민주정의당이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제4차 전당대회 겸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열고 노태우를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함. 같은 날 열린 국본의 6·10 국민대회와 정면으로 대비되며, 정권의 권력 승계 의지를 드러낸 행사. 이후 노태우는 6·29 선언을 거쳐 그해 12월 직선제 대선에서 당선됨.

6월 민주항쟁

전두환이 통일민주당 발기인대회가 열린 4월 13일 특별담화를 통해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현행 제5공화국 헌법으로 차기 대통령 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함. 국민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정면으로 거부한 이 조치는 '4·13 호헌조치'로 불림. 발표 당일부터 각계각층의 반대 투쟁이 터져 나와 6월 항쟁의 직접적 도화선이 됨.

박종철군 49재에 맞춰 3월 3일 '고문추방 민주화 국민평화대행진'이 전국에서 전개됨. 경찰이 도심 건물 옥상까지 봉쇄했으나 각지에서 시위가 이어졌고, 일부 교도소 양심수들은 단식으로 호응함. 2·7 추도대회와 더불어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동력을 다진 행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진 뒤 야당과 재야가 함께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회'를 열고 추도식과 도심 시위를 벌임. 정부의 원천봉쇄에도 서울·부산 등에서 많은 시민이 추도와 항의에 나섬. 흩어져 있던 반정부 세력이 고문 규탄을 고리로 처음 대규모로 결집한 행동.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후 2시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대성당 마당에서 '6월 민주항쟁 20주년 기독교위원회'가 주최한 기념식에 참석해서 한나라당이 6월 항쟁의 의미를 격하하는 것에 대해 발언. "6월항쟁은 국민들이 50년간 빼앗긴 자유를 되찾아온 항쟁이다.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독재를 끊은 이 항쟁 앞에서 어떻게 '잃어버린 10년' 운운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