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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의정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용비어천가》를 가사로 삼은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을 공적·사적 연향에 통용하도록 함. 왕실 선대의 공덕을 노래하는 음악을 종묘에만 한정하지 않고 여러 의례와 잔치에서 사용하도록 정한 조치.

음악을 통한 보급

의정부는 예조의 공문을 바탕으로 왕실의 공적을 위아래에서 함께 노래하게 하자는 뜻을 밝힘. 조참과 외교문서를 보내거나 황제의 조칙을 맞는 행차 등에 사용할 곡과 궁조도 구체적으로 제안했으며, 세종이 이를 따름. 책의 간행·하사와 별도로 노래의 연주 장소와 사용 절차를 제도로 정한 일.

실록은 세종이 《용비어천가》에 관현악을 붙이고 빠르기를 조절해 세 곡을 만들었으며 악보도 갖추었다고 기록함. 한글 가사를 노래하는 치화평·취풍형과 한문 가사를 사용하는 여민락이 궁중 악무의 구성곡으로 이어짐.

세종 대 조정이 개량한 화포의 주조법과 규격, 화약 제조·사용법을 그림과 함께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간행해 군사 기밀로 보관함. 세종이 군기감의 화포 개량과 발사 시험을 직접 지휘한 뒤 1445년 각 도에 새 규격의 화포를 주조하게 한 사업을 집대성한 군서.

집현전 직제학 신석조 등이 태종의 불교 억제를 찬양한 《용비어천가》 구절을 들어 세종의 불당 건립에 반대함. 선대의 정치를 자손이 지켜야 한다는 노래의 내용을 근거로, 이를 편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교를 높이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간함. 세종은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고 공사를 지시함.

왕실 찬양의 노래와 국왕에 대한 간언

신석조 등은 불당의 위치를 궁성 안에서 밖으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주장함. 《용비어천가》에 실린 태종의 사찰 정리와 후손에 대한 경계 내용을 세종에게 적용하면서 선왕을 본받으라고 요구한 것.

세종은 이미 뜻을 정한 일이며 의심이 없는 사안은 독자적으로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힘. 도승지 이사철 등도 신하들의 의견을 따를 것을 청했으나, 세종은 선공 제조 민신을 불러 방패군 200명에게 공사를 시작하게 함. 불교에 대한 배척은 상소한 신하들의 논리로 기록된 것이며, 국왕의 결정은 그들의 요구와 달랐음.

음력 1452년 5월 14일 (율리우스력 6월 1일) 경복궁 근정전에서 제6대 국왕으로 즉위. 아버지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병으로 승하하면서 단종이 뒤를 이음.

세조 3년 음력 1457년 10월 21일 (율리우스력 11월 7일). 영월 유배지에서 16세의 나이로 승하. 실록에는 '자진'으로 기록, 야사나 민간 기록에는 '교살'당한 걸로 기록.

아고스티노 디 두초가 훗날 《다비드》가 될 대리석 덩어리를 처음 다듬기 시작함. 피렌체 대성당의 높은 외부 공간을 장식할 대형 인물상을 만드는 계획에 포함된 작업이었음.

이 제작 경위는 미켈란젤로가 새 돌을 골라 처음부터 작업한 것이 아님을 알려 줌. 그는 앞선 조각가의 작업 흔적과 그로 인한 제약이 남아 있는 재료를 넘겨받아 작품을 완성해야 했음.

다비드 (미켈란젤로)

1469년 10월 19일 카스티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가 바야돌리드에서 혼인. 이후 두 사람이 각 왕국의 통치권을 승계하면서 카스티야와 아라곤 사이의 동군연합이 성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됨.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혼인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두 왕조를 정치적으로 결합하는 출발점이었음. 이사벨은 1474년 카스티야 왕위에, 페르난도는 1479년 아라곤 왕위에 오름.

1469년 혼인 자체가 곧 단일한 스페인 국가의 창설을 뜻하지는 않으며, 이후 각 왕국의 제도와 정치적 전통이 장기간 병존했다는 점을 구분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