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0–1699년의 기록 397건

구간을 선택해 더 좁은 기간으로 좁혀 보세요.

가장 많은 기록
1500–1699 · 188건
관련 엔티티
111개
날짜가 확정된 기록
73%
구간을 선택해 기록 보기 1500–1699 · 188건

538년 백제 성왕이 웅진(현재의 공주)에서 사비(현재의 부여)로 수도를 옮김. 475년 한성 함락 이후 급하게 옮긴 웅진과 달리 더 넓은 평야와 금강 수운을 활용할 수 있는 사비를 계획적으로 새로운 도성으로 개발함.

성왕은 천도를 계기로 중앙 관제와 지방 통치를 정비하고 ‘남부여’라는 국호도 사용함. 한강 유역을 상실한 백제의 국력 회복과 대외교류 확대를 추진한 핵심적인 개혁 조치.

541년 무렵 동로마 제국과 지중해 세계에 선페스트를 포함한 페스트 유행이 나타나며 이른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시작이 기록됨. 여러 차례 재유행하며 지중해 각지에 영향을 미쳤고, 사망 규모와 경제·정치적 영향에 대해서는 사료와 현대 연구의 해석이 엇갈림.

553년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회복했던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하고 신주를 설치함. 551년 백제와 신라 등이 고구려를 압박하며 한강 유역에 진출했으나, 이후 동맹국 사이의 이해관계가 충돌함.

백제는 이를 동맹 위반으로 받아들였고 554년 관산성 전투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 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와 중국 방면 외교·교역로 확대를 설명하는 결정적인 전환점.

554년 현재의 충북 옥천 일대 관산성 부근에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짐. 백제 성왕은 한강 하류 지역을 차지한 신라에 맞섰으나 전투 중 신라군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했으며 백제군이 패배함.

백제와 신라의 외교 협력이 사실상 끝나고 적대관계가 깊어진 사건. 신라의 한강 유역 지배가 굳어지는 동시에 백제의 국력 회복 계획은 큰 타격을 입음. 전투의 구체적 경로와 참가세력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차이가 존재함.

562년 신라 진흥왕이 이사부 등이 이끄는 군대를 보내 고령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를 공격해 정복함.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등에는 신라가 가야 지역을 병합한 사실이 전함.

532년 금관가야의 항복과는 30년의 시간차가 있으므로 가야 전체의 멸망을 한 사건으로 혼동하지 않아야 함. 대가야의 독자적 정치세력이 소멸하고 낙동강 유역 및 영남 내륙의 세력 재편이 진행된 계기.

하드리아노 1세의 장례가 치러진 날 레오 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고 다음 날 축성됨. 교황청 재무와 성당 사제 업무를 경험한 인물이 로마 교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프랑크 왕과의 관계를 이어 가게 됨.

교황 레오 3세

로마에서 대연도 행렬에 나섰던 레오 3세가 반대파의 공격을 받아 구금됨.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벗어난 뒤 스폴레토를 거쳐 프랑크 왕에게 보호를 구함. 당시 신체 훼손 시도와 회복을 둘러싼 기록에는 기적 전승이 섞여 있어, 이를 그대로 의학적 사실로 확정하기는 어려움.

레오 3세가 799년 7월 하순 파더보른에 도착하여 카롤루스 대제의 영접을 받음. 로마에서의 통치 회복과 교황에게 제기된 혐의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으며, 프랑크의 보호가 교황의 복귀를 뒷받침하게 됨.

교황 레오 3세

파더보른 체류를 마친 레오 3세가 프랑크의 성직자·귀족 사절들과 함께 로마로 돌아옴. 복귀만으로 대립이 모두 해소된 것은 아니었으며, 교황에 대한 혐의와 반대 세력의 처리를 둘러싼 논의가 이듬해까지 이어짐.

교황 레오 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