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일 강화교섭 진행과 결렬
일본군의 남해안 후퇴 뒤 명과 일본 사이에서 강화교섭이 장기간 진행됨. 조선의 입장과 명·일 양측의 요구가 엇갈린 가운데 교섭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군의 재침으로 이어짐.
일본군의 남해안 후퇴 뒤 명과 일본 사이에서 강화교섭이 장기간 진행됨. 조선의 입장과 명·일 양측의 요구가 엇갈린 가운데 교섭이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군의 재침으로 이어짐.
조정이 전라·경상·충청의 수군을 통합 지휘할 삼도수군통제사를 신설하고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와 겸임하도록 함. 여러 수사가 협력하던 연합작전에 통일된 지휘권을 부여한 제도적 변화였음. 한산도 진영을 중심으로 해상 방어를 지속하는 과정에서 함대 간 명령과 작전을 조정하는 기반이 됨.
이순신이 한산도로 수군 진영을 옮겨 일본군의 해상 움직임을 감시하고 호남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키는 거점으로 삼음. 선조수정실록에는 한산도가 배를 숨기고 주둔하기에 적합하다는 이전 요청과 조정의 허락이 기록되어 있음. 해도 둔전의 설치를 추진하는 등 장기간 함대와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량 확보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음.
임진왜란 중 피란에서 돌아온 선조가 월산대군 후손의 집을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 시작함. 경복궁과 창덕궁 등 도성의 궁궐이 불탄 상황에서 국왕과 조정이 머물 곳을 마련한 조치. 정릉동 행궁으로 불린 이 공간이 오늘날 덕수궁으로 이어지는 출발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당항포 일대의 일본 선단을 공격함. 1594년에도 남해에서 조선 수군이 해상 주도권을 유지한 전투 가운데 하나임.
프랑스의 화가 니콜라 푸생. (~1665년)
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의 공격을 받아 크게 패배함. 조선 수군의 주력 전력이 무너지고 일본군이 정유재란 초기 남해의 해상 주도권을 확보하게 됨.
정유재란에서 일본군이 남원성을 포위해 조·명 연합 수비군을 격파하고 성을 함락함. 전라도 내륙 방어선이 크게 흔들리며 일본군이 전주와 충청도 방면으로 북상할 수 있는 길이 열림.
1597년(선조 30) 음력 9월 16일 이순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 해협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일본 수군을 격파한 전투.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큰 피해를 입은 뒤 남은 판옥선 13척을 중심으로 전열을 재정비해 일본 함대의 서해 진출을 저지한 사건.
정유재란의 흐름을 바꾸고 조선 수군의 전투 능력을 회복한 중요한 승리. 널리 쓰이는 양력 환산일은 1597년 10월 26일이나, 일부 연구·자료는 10월 25일로 표기하므로 원사료의 음력 날짜와 양력 환산 기준을 구별할 필요.
정유재란에서 북상하던 일본군과 명군이 직산 일대에서 충돌함. 일본군의 충청도 이북 진출이 저지되면서 전선이 다시 남쪽으로 밀려나는 계기가 됨.
조·명 연합군이 울산의 일본군 거점을 포위·공격함. 성을 완전히 함락하지는 못했으나 정유재란 후반 일본군이 남해안 왜성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전선 구조가 뚜렷해짐.
명·일 강화교섭이 결렬된 뒤 일본군이 다시 대규모로 조선을 침공함. 일본군은 전라도 점령을 주요 목표로 삼았으며 임진왜란의 두 번째 대규모 전쟁 단계인 정유재란이 시작됨.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정보를 둘러싼 출진 문제 등이 문책 사유가 되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고 한양으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음. 정탁의 변호로 추가 신문과 중형을 면한 뒤 권율 휘하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한 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 남은 병력과 전선을 수습해 수군을 재건하고 이후 명량 해전 승리로 이어지는 지휘 체계를 복구.
조선 침공을 지시하고 전쟁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함. 일본 지도부는 그의 사망 뒤 조선 주둔군의 철수를 추진했고 임진왜란이 종결 단계로 들어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뒤 일본 지도부가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철수를 추진함. 남해안의 일본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면서 전쟁은 노량해전을 포함한 최종 철수 단계로 들어감.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뒤 일본의 최고 지도부는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의 철수를 지시. 남해안의 일본군은 각 거점에서 안전하게 빠져나가기 위해 대치하던 명군과 철수 교섭을 진행하기 시작했고, 전쟁의 중심도 공세와 거점 유지에서 철수로 이동.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 역시 철군을 추진했으나 조선은 일본군의 무사 철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순신은 해상에서 퇴로를 막으려 함. 이러한 철수 정책과 이를 저지하려는 조선 수군의 움직임이 맞물리면서 순천왜성 봉쇄와 노량 해전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전쟁 국면이 형성됨.
1598년 9월 말부터 10월 초 조·명 연합군이 사로병진작전의 일환으로 순천왜성을 육상과 해상에서 압박.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철수를 모색했으나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이 해상 퇴로를 막으면서 순천 일대에 고립된 상태가 이어짐.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뒤 일본군이 철수 단계로 들어간 가운데, 조·명 연합군은 남해안의 일본군 거점을 동시에 공격하는 사로병진작전을 전개. 순천 방면에서는 명나라 장수 유정과 조선군이 육상에서 순천왜성을 공격하고, 이순신과 명 수군 도독 진린이 이끄는 수군이 해상에서 호응.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은 육상과 해상 양쪽에서 압박을 받으며 철수를 모색했으나 해상 퇴로가 차단돼 쉽게 빠져나가지 못함. 육상 공격은 결정적인 함락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고니시군의 안전한 철수가 어려워진 상황은 이후 구원 요청과 노량 해전으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군사적 배경이 됨.
노량 해전 전날 밤, 순천왜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지원하려는 일본 구원함대가 노량 수로와 왜교 일대에 집결.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조·명 연합수군의 진형을 정비하고 일본 함대를 맞을 전투태세에 돌입.
순천왜성에서 퇴로가 막힌 고니시 유키나가는 사천의 시마즈 요시히로 등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남해안 각지의 일본 수군이 순천 방면으로 움직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음력 11월 18일 밤 노량 수로와 왜교 일대에 약 500척의 일본 선박이 집결했다고 전함.
이순신은 일본 구원함대가 고니시군의 철수를 지원하며 조·명 연합수군을 협공하려는 움직임으로 판단하고 진린과 함께 진형을 재정비. 약 200척 규모의 조·명 연합수군은 노량 해역에서 일본 함대를 맞을 준비에 들어갔으며, 이어지는 새벽 전투가 노량 해전으로 확대됨.
정확한 시각을 특정할 수 있는 권위 있는 자료는 제한적이므로, 이 사건은 특정 시간대보다 ‘12월 15일 밤 전투태세 돌입’이라는 수준으로 정리.
1598년 12월 16일 이순신과 명 수군 도독 진린이 이끄는 조·명 연합 수군이 노량 해역에서 철수 중인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으로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입혔으며, 전투 막바지 이순신이 전사.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이후 일본군이 조선에서 철수를 서두르던 가운데, 순천 왜교성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군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일본 수군이 노량 해역으로 이동.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진린이 지휘하는 명 수군은 일본 함대의 이동을 차단하고 공격하기 위해 노량 일대에서 연합 작전을 전개.
1598년 12월 16일 새벽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 수군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며, 전투는 노량에서 관음포 일대로 이어짐. 연합 수군은 철수하려던 일본 함대를 공격해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일본 함대 일부는 전투를 뚫고 빠져나감. 명 수군에서도 등자룡이 전사하는 등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은 격전.
전투 막바지 이순신은 일본 함대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총탄을 맞아 전사. 그러나 전투는 계속됐고 조·명 연합 수군은 일본군의 퇴각을 압박. 노량 해전은 일본군 철수 자체를 결정한 전투라기보다 이미 진행 중이던 철수 국면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규모 해상 결전으로, 임진왜란 종결을 상징하는 전투로 남음.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 수군을 지휘하던 이순신이 철수하는 일본 함대를 추격하던 중 총탄을 맞아 전사.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 도중 발생한 죽음.
1598년 12월 16일 노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과 함께 철수하려는 일본 함대를 공격하며 전투를 지휘. 전투가 노량에서 관음포 일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조·명 연합 수군은 일본 함대에 큰 피해를 입히며 추격전을 계속함.
전투 막바지 이순신은 지휘 중 총탄을 맞아 전사. 그의 죽음은 전투가 끝나기 전에 발생했으며, 지휘부는 전열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이를 즉시 널리 알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짐. 이후 조선 수군은 전투를 이어가 일본 함대의 철수를 압박.
이순신의 전사는 7년에 걸친 임진왜란의 마지막 대규모 해전과 겹치며 강한 상징성을 갖게 됨. 노량 해전의 승전과 함께 그의 생애 마지막 전투로 기억되며, 이후 조선에서는 전쟁 수행과 수군 지휘에서의 공적을 기리는 평가가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