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포 해전 발발
옥포·합포 승전 다음 날 이순신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적진포에 있던 일본 선단을 공격해 격파.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세 번째 연속 승전.
옥포·합포 승전 다음 날 이순신과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적진포에 있던 일본 선단을 공격해 격파. 임진왜란 초기 조선 수군의 세 번째 연속 승전.
신각·이양원 등이 이끄는 조선군이 양주 해유령 부근에서 일본군 부대를 공격해 격파함. 임진왜란 초기 육상전의 드문 승전이었으나, 신각은 앞선 전황에 대한 잘못된 보고로 승전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기 전에 처형됨.
이순신이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여 사천의 일본 군선을 공격함. 적을 바다 쪽으로 유인하고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했으며, 이순신은 전투 중 어깨에 총상을 입음. 이 해전은 거북선의 첫 실전 투입으로 알려져 있으며, 유인과 화력을 결합한 전술이 이후 해전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줌.
이순신 등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당포에 정박한 일본 선단을 공격해 격파함. 이후 당항포·한산도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 수군의 연속 공세 가운데 하나가 됨.
이순신·이억기·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고성 당항포의 일본 선단을 공격해 대규모로 격파. 사천·당포에 이어 진행된 제2차 출전의 주요 승전.
제2차 출전 마지막 단계에서 이순신이 달아나는 일본 전선을 율포까지 추격해 격파. 사천·당포·당항포로 이어진 연속 해전의 마무리.
전라좌수사 이순신과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작전 협의를 거쳐 함대를 이끌고 출항함.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함대와 합류하며 연합전력을 구성함. 이튿날 당포에서 일본 함대가 견내량에 있다는 정보를 얻었고, 이 출전은 한산도와 안골포에서의 연속 해전으로 이어짐.
이순신·이억기·원균이 지휘한 조선 수군이 견내량에 있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펼치고 화포 공격을 집중함. 조선 측 보고에 따르면 일본 함선 73척 가운데 59척을 격파함. 이 승리는 일본 수군의 서진을 저지하고 호남 방어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 조선 연합수군이 안골포에 정박한 일본 함대를 공격함. 일본 함대가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함선들이 교대로 접근하여 화포를 쏘는 방식으로 전투를 전개함. 넓은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친 한산도와 달리 포구의 조건에 맞추어 전술을 바꾼 후속 작전이었음.
이순신·이억기·원균의 연합수군이 일본군의 주요 거점인 부산포로 진출하여 정박 중인 함선들을 공격함. 한산도·안골포의 승전 이후에도 공격적 해상 작전을 이어간 사례였음. 일본군의 병참 거점을 압박한 의미가 있으나, 부산의 육상 거점 자체를 탈환한 전투와는 구분해야 함.
김시민이 지휘한 진주성 수비군과 의병이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냄. 경상우도와 전라도로 이어지는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한 임진왜란 초기 육상전의 대표적 승전 가운데 하나임.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면서 궁성의 정문인 광화문과 그 안쪽 중문인 홍례문도 소실됨. 궁궐의 남쪽 출입·의례 공간이 함께 훼손된 사건으로, 이후 약 270년 동안 본격적인 중건이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고종 대에 복구됨.
1592년 음력 1월 1일, 전라좌수영에서 새해를 맞으며 어머니를 떠나 지내는 마음을 적은 기록. 전라좌수영은 당시 이순신이 근무하던 수군 지휘부. 나중에 출판된 《이충무공전서》 등의 내용으로 없어진 원본 부분을 보충했을 때 확인되는, 오늘날 전하는 일기의 첫 날짜.
평양을 탈환한 뒤 남하하던 이여송의 명군이 벽제관 일대에서 일본군과 충돌해 패배함. 명군의 한양 진격이 둔화되고 이후 명과 일본 사이의 강화교섭이 본격화되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
이여송이 지휘한 명군과 조선군이 평양성을 공격해 일본군을 물리치고 평양을 되찾음. 일본군의 북상 기세를 꺾고 조·명 연합군의 본격적인 남하 반격이 시작된 전환점이 됨.
권율이 지휘한 조선군이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을 격퇴함. 평양성 탈환 이후 한양 주변의 일본군을 압박한 대표적 승전으로 기록됨.
평양성 패전과 조선 관군·의병·수군의 압박, 명군의 남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해 남해안 방면으로 이동함. 전선이 남부 지역으로 축소되고 명·일 강화교섭이 진행되는 계기가 됨.
대규모 일본군이 진주성을 포위·공격해 성을 함락함. 김천일·최경회·황진 등 관군과 의병이 항전했으나 많은 군민과 함께 희생되었으며, 1592년 1차 전투의 패배를 만회하려는 일본군의 대규모 공세로 기록됨.
임진왜란에서 기존 군사제도의 한계가 드러나자 조선이 중앙군영인 훈련도감을 설치함. 포수·살수·사수의 삼수군 체제를 중심으로 군사를 훈련하고 급료를 지급하는 새로운 상비군 운영의 기반이 마련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