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남. 뒷날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성장해 우리말과 글을 지키는 데 일생을 바친 인물. 호는 고루.
이극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 분단 이후 북한에 이르기까지 우리말과 글의 보존·체계화에 평생을 바친 국어학자이자 독립운동가. 호는 고루.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나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 예과와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을 거치며 학문을 닦았고, 유학 시절 베를린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직접 개설해 무보수로 우리말을 가르친 인물.
1929년 귀국 후 조선어연구회(뒷날 조선어학회)에 합류해 간사장·회장을 맡으며 조선어사전 편찬, 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표준말 사정·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을 실무에서 이끈 한글 운동의 기획자이자 추진자.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의 가장 핵심 인사로 지목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광복으로 출옥. 해방 후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으로 한글 연구를 다시 이끌며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
1948년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갔다가 북에 잔류하여, 이후 무임소상·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내고 1966년 이후 북한의 언어 규범화 운동인 문화어 운동을 주도. 분단으로 인해 남북 양쪽에서 오랫동안 온전히 조명받지 못했으나, 우리말의 과학적 연구와 보존에 남긴 자취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는 한글 운동의 대표적 인물. 2019년 영화 《말모이》의 주인공 류정환의 실제 모델로도 알려짐.
추가 정보
출생과 망명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 농가에서 출생. 전의 이씨 후손으로, 서당에서 한학을 익힌 뒤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1912년 서간도로 망명해 회인현 동창학교에서 윤세복을 만나 대종교에 귀의하고 교사로 활동하며 박은식 등 민족주의자들과 교유.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독일인이 운영하던 동제대학에서 서구 학문을 체계적으로 접함.
독일 유학과 조선어 강좌
1920년 상하이 동제대학 예과를 마친 뒤 독일로 건너가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 유학 중이던 1923년 이 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고 무보수로 약 3년간 우리말을 가르쳤으며, 이광수의 《허생전》을 한글 교재로 만들어 활용. 1927년 5월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피압박민족반제국주의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해 일제의 식민 통치를 국제 사회에 고발.
조선어학회와 한글 운동
1929년 1월 귀국해 조선어연구회에 합류,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사전 편찬을 실무에서 주도. 조선어학회 간사장·회장을 맡아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제정을 이끎. 우리말 규범의 골격을 세운 핵심 추진자.
조선어학회 사건과 광복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최현배·이윤재와 함께 가장 핵심적인 인사로 지목되어 검거됨. 함흥재판소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45년 광복 이틀 뒤 출옥. 해방 후 재건된 조선어학회 회장으로 취임해 한글 연구를 다시 이끌며 《조선말 큰사전》 편찬 사업을 재개.
월북과 북한에서의 활동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북에 잔류. 같은 해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무임소상에 발탁되고,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 1966년 이후 북한의 언어 규범화 운동인 문화어 운동을 주도했고, 1978년 평양에서 사망해 애국렬사릉에 안장됨.
타임라인
18이극로가 독일 유학 중이던 1923년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현 훔볼트대학)에 유럽 최초의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고 무보수로 약 3년간 우리말을 가르침. 이광수의 《허생전》을 한글 교재로 만들어 활용했으며, 이 교재는 오늘날까지 대학 도서관에 보관됨. 서양에서 이뤄진 한국어 교육의 효시로 평가됨.
중국 상하이 동제대학을 거쳐 독일로 건너간 이극로가 1927년 베를린대학(현 훔볼트대학)에서 학위를 받음. 유학 중 대학에 한국어 강좌를 열어 우리말을 알리는 데도 힘씀. 서구 학문을 익히고 돌아와 한글운동에 투신하는 밑바탕이 된 시기.
1929년 1월 귀국한 이극로가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우리말 연구와 보급의 한복판에 섬. 조선어사전 편찬과 한글 규범화 작업을 이끌며 흩어진 말과 글을 바로 세우는 일에 매진. 식민지 한글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끈 지도자로 자리 잡음.
한글날 기념식에서 100여 명에 이르는 각계 인사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우리말 사전 편찬에 착수함. 신명균·이극로·이윤재·이중화·최현배가 집행위원으로, 이극로·이윤재·한징 등이 편찬원으로 선정됨. 28년 뒤 『큰사전』 완간으로 결실을 맺는 대장정의 출발점.
약 3년의 제정 작업과 1년의 수정을 거친 통일안을 10월 19일 임시총회에서 확정하고, 10월 29일 한글날 기념식에서 발표함. 한국어 정서법의 근간을 처음으로 통일한 규정. 오늘날 한글 맞춤법의 직접적 토대.
조선어학회,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공표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를 두어 1935년 1월부터 1936년 8월까지 표준말 사정을 끝내고 한글날에 공표함. 전국에서 두루 통할 표준어의 기준을 처음으로 체계화한 작업. 사전 편찬과 국어 교육의 바탕이 됨.
외국 인명·지명 표기를 통일하기 위한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1940년 6월 7일 최종 확정하고 발표(공표), 1941년 1월 간행함. 맞춤법 통일안 제정에 착수할 때부터 준비해 온 작업으로, 맞춤법·표준어와 함께 어문 3대 규범을 완성함. 『큰사전』의 외래어 표기 기준으로 쓰임.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 단체로 규정하고 10월 1일 이중화·장지영·최현배 등 11명을 시작으로 회원과 후원자들을 잇달아 검거함. 1943년 4월까지 33명이 붙잡혀 치안유지법 내란죄로 몰렸고, 사전 편찬 원고와 서적은 모두 압수됨. 학회 활동과 『큰사전』 편찬이 전면 중단된 일제 말기의 대표적 민족 탄압 사건.
1944년 12월부터 9차례 이어진 공판 끝에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등을 선고함. 사전 편찬을 민족운동의 형태로 규정한 예심 결정에 따라 치안유지법 내란죄가 적용됨. 학문 활동 자체를 독립운동으로 처벌한 판결.
상고가 8월 13일 기각되었으나 이틀 뒤 광복을 맞아 8월 17일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4명이 풀려남. 석방된 회원들은 곧바로 학회를 재건하고 한글날 행사를 되살림. 중단되었던 우리말 사전 편찬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계기.
조선어학회, 서울역 창고에서 《큰사전》 원고 되찾음
조선어학회 사건의 재판 증빙 자료로 경성고등법원에 보내졌던 사전 원고가 경성역(지금의 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발견됨. 10여 년에 걸친 어휘 수집과 집필의 결실이 사라질 뻔하다 극적으로 돌아온 것. 이 원고를 바탕으로 『큰사전』 간행이 재개되었으며, 원고는 뒷날 국가지정기록물 제4호로 지정됨.
한글날에 맞춰 『조선말 큰사전』 1권을 펴냄. 1929년 편찬회 조직 이후 18년 만에 나온 첫 결실로, 우리 민족의 손으로 만든 첫 한국어 대사전의 출발. 이후 1949년 2권이 이어지고 학회 개칭 뒤 『큰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완간됨.
1948년 4월 19일부터 열리는 남북 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참석을 위해 평양으로 향함. 회의 뒤 김구, 김규식 등이 5월 초 서울로 돌아온 것과 달리 이극로는 남으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북에 잔류함. 이로써 평생을 바친 한글운동의 무대를 남에서 북으로 옮긴 전환점.
이극로가 1966년 이후 본격화한 북한의 언어규범화 운동인 '문화어운동'을 주관함. 평양말을 기준으로 한 표준어 정비와 한자어·외래어 순화 등 북녘 언어 정책의 방향을 세움. 남과 북의 언어가 갈라지는 흐름 속에서 북측 언어 규범을 다진 활동.
이극로가 1978년 85세로 평양에서 세상을 떠남. 식민지 시기 한글을 지키고 분단 이후 북녘의 언어 정책을 이끈 생을 마감함. 남과 북 모두의 우리말 역사에 굵은 자취를 남긴 국어학자의 영면.
조선어학회가 일제강점기 우리말 사전 편찬을 추진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 《말모이》개봉함. 영화 속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은 이극로를 주요 실존 모델로 삼아 창작된 인물로, 이극로가 이끈 조선어학회의 말모이·사전 편찬 활동이 대중적으로 재조명되는 계기가 됨.
그 외 사실들
기록
조선어학회 간사장으로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1933), 표준어 사정(1936),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 오늘날 한국어 어문 규범의 뼈대를 세우는 작업을 이끎.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된 회원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징역 6년형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함.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48년 월북 이후 남과 북 양쪽의 어문 정책에 모두 관여한 드문 국어학자로, 북한에서는 1966년 이후 '문화어운동'을 주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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