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뒤 독립운동 열기의 고조와 입학생 증가로 기존 합니하 시설의 수용 한계가 커지자, 유하현 제3구 고산자 하동 대두자로 이전·개교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고산자 학교를 본교로 삼고 합니하 학교는 분교로 운영. 장교반 6개월·하사관반 3개월·특별훈련반 1개월의 단기 군사교육과정을 편성하며 독립군 양성 체제 정비. 윤기섭이 교감, 이세영이 교장을 맡고 성준용·원병상·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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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뒤 독립운동 열기의 고조와 입학생 증가로 기존 합니하 시설의 수용 한계가 커지자, 유하현 제3구 고산자 하동 대두자로 이전·개교하고 신흥무관학교로 개칭.
고산자 학교를 본교로 삼고 합니하 학교는 분교로 운영. 장교반 6개월·하사관반 3개월·특별훈련반 1개월의 단기 군사교육과정을 편성하며 독립군 양성 체제 정비. 윤기섭이 교감, 이세영이 교장을 맡고 성준용·원병상·이범석 등이 교관으로 참여.
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 당시 일제는 경성이라고 불렀으나 한일병합 이전, 조선시대에는 한성이라 불렸고, 이를 따라 한성정부(漢城政府)라 함.
미국의 기업인, 자선가, 영화 프로듀서 앤 바이든스. (~2021년)
대한민국의 시인 김종문. (~1981년)
일본군 중위 아리타 도시오가 이끄는 군경이 경기도 화성 제암리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가둔 뒤 총격을 가하고 불을 질러 학살함. 이 사건으로 28명이 목숨을 잃고 인근 마을을 포함해 30여 채의 집이 불탐. 캐나다인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가 현장을 사진과 기록으로 남겨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린, 3·1운동 탄압의 대표적 참상.
3·1운동으로 분출된 독립 열망을 이어받아, 중국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함.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민주공화제를 핵심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채택함. 군주국이 아닌 국민주권의 공화국을 표방한 한국 최초의 민주공화제 정부로, 3·1운동의 가장 큰 정치적 결실로 평가됨.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 파리에 체류하던 김규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총장 겸 파리 주재위원으로 선임. 임시정부는 4월 13일 외무총장 임명장과 파리 강화 회의 전권대사 신임장을 전보로 발송. 김규식은 임시정부를 대표하는 공식 외교관의 자격으로 파리에서 독립 외교를 전개함.
이화학당 학생 유관순이 고향인 충남 천안 병천(아우내) 장터에서 조인원·유중권 등과 함께 수천 명이 참여한 대규모 만세 시위를 주도함. 일제 헌병의 발포로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해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다수가 부상함. 유관순은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 이듬해 옥중에서 순국, 3·1운동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음.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평양·진남포·의주 등 북부 도시를 거쳐 전국 거의 모든 군으로 번지며 약 두 달간 이어짐. 학생·농민·노동자·상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했고, 만주·연해주·미주 등 국외 한인 사회로도 시위가 확산됨. 신분과 지역을 넘어선 거족적 항쟁으로,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으로 기록됨.
1919년 2월 1일 발표한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문창범 등이 중심이 되어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설립한 첫 임시정부.
신한청년당이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한 한국 대표로서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해 3월 13일 파리에 도착. 파리 샤토당 거리 38번지에 평화회의 한국민대표관을 설치하고 파리한국통신부를 운영하며 한국 독립을 알리기 위한 외교·홍보 활동에 착수. 회의 참석 자격이 정부 대표로 제한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상하이에 임시정부 수립과 대표 신임장 발급을 요청함.
매일신보가 1919년 3월 7일 3·1운동 관련 보도를 내며 이를 ‘소요사건’으로 다룸. 당시 전국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일부 전하면서도, 운동의 의미를 깎아내리고 총독부 기관지의 시각으로 해석. 조선어 유일 일간지였던 매일신보가 식민 통치의 선전 매체로 기능한 사례.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으로 자리를 옮긴 가운데,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 앞에서 정재용이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함. 낭독이 끝나자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울의 만세시위가 시작됨. 이 시위를 신호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 각지로 들불처럼 번진 3·1운동의 출발점.
1919년 3월 1일 시작된 3·1운동에서 전국의 시위 군중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침. 일제가 금지한 태극기를 거리에 내건 행위 자체가 독립 의지의 표현이었고, 이를 계기로 태극기는 광복 이전까지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상징으로 굳어짐. 같은 해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태극기를 국기로 계승함.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 모여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국의 독립을 선언함.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시민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섬. 비폭력 만세 시위로 시작된 이날의 선언이 전국으로 번지는 3·1운동의 출발점.
이광수가 1월 31일 고베를 거쳐 상하이로 건너가 영문 2·8 독립선언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윌슨·클레망소·로이드 조지 등에게 전문으로 보냄. 또한 상하이 영자신문에 도쿄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을 보도하도록 요청하며 한국의 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알리려 한 활동.
천도교가 경영하던 보성사 인쇄소에서 사장 이종일이 독립선언서 약 2만 1천 부를 비밀리에 인쇄함. 2월 27일 밤 급박하게 진행되었으며, 인쇄 도중 종로경찰서 형사에게 발각될 뻔한 위기를 넘김. 완성된 인쇄본은 2월 28일부터 3월 1일에 걸쳐 천도교·기독교·불교 조직과 학생들을 통해 전국으로 배포됨.
손병희를 중심으로 한 천도교계가 기독교의 이승훈, 불교의 한용운 등과 손잡아 종교계 연합 전선을 구성함. 천도교 15인·기독교 16인·불교 2인 등 모두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하고 손병희를 총대표로 추대함. 유림 측의 참여 교섭은 시간이 촉박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