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 측 최린의 요청을 받은 최남선이 독립선언서 본문과 함께 파리강화회의 대표들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정부에 대한 통고문 등을 1919년 2월 20일 무렵 완성함.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였으나 후환을 우려해 민족대표 명단에는 서명하지 않음. 선언서 끝에 붙은 공약 3장의 작성자를 두고는 최남선 단독설과 한용운 관여설이 함께 전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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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일본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조선청년독립단 이름으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 집회에는 약 600명이 참석했으며, 선언식 뒤 약 400명이 가두시위를 시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저지와 강제 해산으로 주동자들이 검거됨. 선언서와 관련 문건은 같은 날 일본 정부와 의회, 각국 외교 공관과 언론사 등에 발송되었으며, 국내 독립운동 세력에 자극을 주어 3·1운동 준비를 촉진한 선도적 사건으로 평가.
재일 조선인 유학생 실행위원들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작성에 착수. 백관수·김도연·이광수가 기초위원으로 선출되고, 실제 선언서 문안은 이광수가 전담한 것으로 알려짐. 완성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한국어·일본어·영어로 마련하며 도쿄에서 독립을 선포하기 위한 조직과 문건을 갖춘 단계.
대한제국 초대 황제이자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함. 갑작스러운 죽음을 두고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크게 고조됨. 고종의 국장(인산일)을 앞두고 전국에서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들어, 며칠 뒤 3·1운동이 폭발하는 사회적 배경이 됨.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해 결성된 신한청년당에 김규식이 참여하고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할 한국 대표로 선정됨. 영어와 국제 정세에 능통했던 김규식을 통해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호소하기로 결정.
1911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1918년 무렵 경성전수학교(뒷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함. 같은 해 대구지방법원 상주지청 서기로 임용된 뒤 공주지방법원 서산지청·홍성지청 서기로 옮겨 1920년대 초까지 법조 실무에 종사함. 근대 학교 교육을 받은 뒤 사법 실무로 사회에 진출한 출발점.
미국의 경제학자 프란코 모디글리아니. (~2003년)
대한민국의 태권도의 무술가, 창시자 최홍희. (~2002년)
일본의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 (~2019년)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1988년)
제2차 세계대전의 유일한 소련군 조선인 참전자 정상진. (~2013년)
일본의 정치가 다나카 가쿠에이. (~1993년)
미국의 지형학자 그로브 칼 길버트. (1843년~)
사라예보 사건의 범인 가브릴로 프린치프. (1894년~)
대한민국의 법조인 태윤기. (~2012년)
독일의 물리학자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 (1850년~)
미국의 영화 배우 윌리엄 홀든. (~1981년)
대한민국의 비전향 장기수 신린수.
대한민국의 군인 송요찬. (~198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