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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 여성재단이 여자아이의 자존감과 진로 시야를 넓히기 위해 ‘딸을 직장에 데려가는 날’을 미국 전역에서 처음 시행함.

이 캠페인은 학교와 직장에 여성의 노동 경험을 연결해, 사춘기 여자아이들이 직업 세계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상상하도록 기획되었다. 스타이넘은 재단 공동 창립자로서 캠페인의 상징적 지지자였지만, 실제 개발과 전국 확산에는 재단 대표 마리 윌슨과 교사·보호자·사업장의 협력이 핵심적이었다.

2003년부터는 남자아이도 포함하는 ‘Take Our Daughters and Sons to Work Day’로 확대되었다. 이 변화는 성평등 교육이 여자아이의 기회 확대뿐 아니라 모든 아동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다루는 방향으로 넓어진 과정을 보여준다.

글로리아 스타이넘을 포함한 국제 여성 평화활동가 30명이 북한에서 남한으로 비무장지대를 넘어 한반도 종전과 평화협정, 이산가족 상봉, 평화과정의 여성 참여를 촉구함.

참가자들은 평양에서 북한 여성들과 행사를 열고 남쪽으로 이동했다. 판문점을 걸어서 넘으려던 계획은 유엔군사령부의 불허로 바뀌어, 개성공단을 통과하는 경로를 버스로 이동한 뒤 남한에서 평화행진을 이어갔다.

행사는 정전 상태와 여성의 평화협상 참여를 국제적으로 환기했지만, 북한 정부가 행사를 선전에 이용할 수 있고 북한 인권 문제를 충분히 제기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주최 측은 시민 간 접촉과 대화가 고립보다 평화에 기여한다고 답했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되는 미국 최고 권위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훈장을 받음.

백악관은 스타이넘이 여성운동의 지도자이자 작가·조직가로서 평등과 정의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수훈은 급진적 사회운동의 요구를 전달하던 인물이 수십 년 뒤 국가적 공로자로 인정받은 장면이었다.

동시에 국가 훈장은 한 인물과 운동 전체의 역사적 논쟁을 해소하는 최종 평가가 아니다. 이 사건은 스타이넘의 주류 제도권 내 위상이 얼마나 커졌는지를 보여주는 표지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뉴스와 대중문화에서 여성의 목소리와 전문성이 더 정확하고 다양하게 반영되도록 하기 위해 여성미디어센터를 공동 창립함.

여성미디어센터는 여성 전문가와 언론을 연결하고, 미디어의 성별 대표성을 조사하며, 교육과 자체 콘텐츠 제작을 수행했다. 스타이넘의 오랜 잡지 경험은 이 활동을 단순한 이미지 개선이 아니라 의제 설정 권력의 문제로 보는 데 연결되었다.

공동 창립자 제인 폰다와 로빈 모건의 역할을 함께 기록하는 것은 이 단체 역시 스타이넘 개인의 단독 사업이 아니라 협업으로 출발했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글로리아 스타이넘

1960년대 이후의 주요 기사와 에세이를 모은 선집 《Outrageous Acts and Everyday Rebellions》를 출간함.

책에는 플레이보이 클럽 잠입취재, 여성의 정치·노동·몸에 대한 글, 「If Men Could Menstruate」 같은 풍자 에세이가 실렸다. 서로 다른 시기에 발표한 글을 한 권에 묶으면서 스타이넘의 저널리즘과 운동 논리가 장기적 기록으로 정리되었다.

이 선집은 대중적 접근성과 논쟁적 개입을 결합한 그의 글쓰기 방식을 보여주며, 이후 판본과 번역을 통해 여러 세대의 독자에게 읽혔다.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미국 최초의 연방정부 지원 전미여성회의에 대표·연설자로 참여해 ERA, 재생산의 자유, 소수자 여성의 권리 등 전국 행동계획 논의에 힘을 보탬.

회의에는 각 주와 준주에서 선출된 대표 약 2천 명과 수많은 참관인이 모였다. 참가자들은 평등권 수정헌법, 보육, 고용, 가정폭력, 장애여성·성소수자·소수인종 여성의 권리 등을 포괄한 전국 행동계획을 채택했다.

스타이넘은 회의의 상징적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지만, 의제는 다양한 여성 집단의 협상과 갈등을 통해 형성되었다. 동시에 보수 진영은 별도 집회를 열어 ERA와 낙태권에 반대했고, 이후 미국 성정치의 양극화가 뚜렷해졌다.

《뉴욕》 잡지에 삽입된 《Ms.》 시험판을 발행해 여성의 정치·노동·재생산권과 일상 경험을 페미니스트 관점에서 다루는 전국 잡지의 가능성을 시험함.

시험판은 예상보다 큰 독자 반응을 얻었고, 1972년 독립 정기간행물 출범으로 이어졌다. 창간 작업에는 글로리아 스타이넘과 패트리샤 카빈, 레티 코틴 포그레빈, 메리 톰 등 여러 편집자가 참여했다.

《Ms.》는 여성 독자를 소비와 가사의 대상으로 보던 기존 여성지 관행을 거슬러 낙태, 임금, 가정폭력, 정치 대표성 같은 문제를 공론장에 올렸다. 스타이넘의 대중적 인지도와 《뉴욕》의 유통망은 중요했지만, 잡지의 성립은 집단적 편집 노동의 결과였다.

클레이 펠커가 창간한 주간지 《뉴욕》에서 정치·사회·대중문화 기사를 쓰는 기고편집자로 활동을 시작함.

《뉴욕》은 스타이넘이 선거정치와 사회운동을 장문 기사로 다룰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이 지면에서 여성해방운동을 대중 독자에게 해설했고, 잡지 제작 경험과 독자망은 훗날 《Ms.》 시험판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스타이넘의 역할은 공동 창간자 또는 창간 초기 핵심 필자로 설명되지만, 잡지 자체는 펠커와 여러 편집자·기자의 협업으로 출범했다.

미국 상원 사법위원회 헌법수정 소위원회에서 성별에 따른 법적 차별을 금지하는 평등권 수정헌법(ERA)의 비준을 촉구함.

스타이넘은 법과 관행이 여성의 임금·교육·직업·가족 내 지위를 제한한다고 설명하고,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성별 고정역할을 강요하는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증언은 여성운동의 요구를 의회 기록과 헌법개정 논의 안으로 옮긴 대표적 장면이다.

ERA는 1972년 의회를 통과했지만 정해진 기한 안에 필요한 수의 주 비준을 얻지 못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즉각적 제도 변화의 완결보다 장기화된 성평등 헌법정치의 한 단계로 보아야 한다.

급진 여성단체 레드스타킹스가 연 낙태 경험 공개 증언회를 취재한 뒤, 여성의 경험을 당사자가 직접 말하는 방식의 정치적 힘을 확인하고 여성해방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함.

당시 낙태는 미국 다수 지역에서 불법이었고 공적 토론은 주로 남성 전문가가 주도했다. 증언회는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지식과 정치 요구의 근거로 제시한 자리였다. 스타이넘 자신도 젊은 시절 낙태 경험이 있었으나 이를 오랫동안 공개하지 못했다.

그해 4월 그는 《뉴욕》에 「After Black Power, Women's Liberation」을 발표해 여성해방운동의 요구를 대중 독자에게 소개했다. 이후 도러시 피트먼 휴스 등과 전국 순회 강연에 나섰으며, 이 전환은 개인의 각성뿐 아니라 급진적 풀뿌리 운동과의 접촉에서 이루어졌다.

스미스 칼리지에서 행정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뒤 장학 프로그램으로 인도에 머물며 풀뿌리 조직화와 비폭력 정치운동을 접함.

스타이넘은 결혼과 정착을 기대하던 당시 여성의 통상적 진로를 미루고 인도로 향했다. 현지에서 토지개혁 운동과 공동체 조직화 방식을 접한 경험은 이후 미국 여성운동에서도 현장 증언, 순회 강연, 연합 조직을 중시하는 태도의 배경이 되었다.

독립연구서비스를 이끌며 세계청년축제에 참가할 미국 학생들을 조직함. 이 사업은 CIA의 비밀 자금을 받았고 스타이넘은 훗날 자금 출처를 알고 있었다고 인정하며 협력을 옹호함.

냉전기 미국은 소련권이 주도한 세계청년축제에 비공산권 미국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지원했고, 스타이넘이 운영한 독립연구서비스가 그 사업을 맡았다. CIA 자금 연계는 1967년 언론 보도로 공개되었다.

이 경력은 스타이넘의 판단과 냉전기 자유주의의 한계를 둘러싼 정당한 비판 대상이다. 다만 이 활동은 그가 여성해방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기 전인 1958~1962년에 이루어졌으므로, 이를 근거로 CIA가 이후의 여성운동 전체를 창설하거나 통제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사실관계를 넘어선 해석이다.

뉴욕 플레이보이 클럽에 ‘버니’로 위장 취업해 여성 종업원의 임금·복장·건강검진과 성적 대상화 실태를 기록한 2부작 「A Bunny's Tale」을 발표함.

기사는 화려한 접객 이미지 뒤에 낮고 불안정한 수입, 엄격한 외모 규율, 고객의 성희롱 위험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잠입취재는 스타이넘을 대중에게 알렸지만, 편집자들이 그를 ‘버니 기자’로만 보면서 정치·사회 취재를 맡기지 않는 역효과도 낳았다.

이 사건은 스타이넘이 처음부터 여성운동 지도자로 알려진 것이 아니라, 여성 기자에게 허용된 취재 범위와 편견을 통과해 경력을 쌓았음을 보여준다.

미디어 아시아가 첫 작품 개봉 20주년을 맞아 《무간도》 삼부작을 4K 화질과 돌비 애트모스 음향으로 복원해 홍콩 극장에서 재개봉함. 첫 작품의 최초 개봉일과 같은 12월 12일에 세 작품을 함께 공개함.

일회성 흥행과 수상에 그치지 않고 20년 뒤에도 극장용 복원·재개봉이 이루어진 작품의 장기적인 문화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건.

《무간도》의 성공에 이어 프리퀄 《무간도 2: 혼돈의 시대》가 2003년 10월 1일, 《무간도 3: 종극무간》이 같은 해 12월 12일 공개되며 삼부작이 완성. 2편은 두 주인공이 첩자가 되기까지의 과거를, 3편은 첫 작품 전후의 시간을 교차해 원작의 세계를 확장. 단일 흥행작에서 영화 시리즈로 자리 잡은 전환점.

워너 브라더스와 브래드 그레이·브래드 피트의 플랜 B가 미디어 아시아로부터 《무간도》의 영어판 리메이크 판권을 약 175만 달러에 확보함. 이 계약은 홍콩 원작을 할리우드에서 재제작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이후 마틴 스콜세지의 《디파티드》로 이어짐.

무간도

3건

파이낸셜타임스가 허깅페이스가 2025년 말 엔비디아의 잠재적 5억 달러 투자를 거절했다고 보도. 제안은 허깅페이스의 기업가치를 70억 달러로 평가하는 조건. 허깅페이스와 엔비디아는 제안 자체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으며, 허깅페이스는 단일 지배적 투자자가 회사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입장 표명. 실제 제안·거절의 정확한 날짜는 공개되지 않아 기사 공개일을 이벤트 날짜로 사용.

엔비디아

엔비디아가 허깅페이스 인수를 위한 최종계약 체결. 주주 지급 약 119억 달러와 합류 직원 대상 최대 약 10억 달러의 주식 기반 잔류 보상 프로그램을 포함하며, 엔비디아 발표 기준 전체 규모는 129억 3,030만 달러. 거래는 규제 승인 등 통상적인 종결 조건을 충족하면 2027년 상반기 완료 예정. 엔비디아는 허깅페이스를 개방형 플랫폼으로 유지하고 다른 칩·클라우드·모델도 계속 지원하겠다고 약속. 현 시점은 인수 완료가 아니라 계약 체결 단계.

엔비디아

허깅페이스와 엔비디아가 GTC Paris에서 ‘Training Cluster as a Service’ 제공을 발표. 허깅페이스 이용 조직이 필요한 규모·지역·기간을 지정하면 양사가 클러스터의 조달·가격·프로비저닝·설정을 함께 수행하고, 엔비디아 DGX Cloud Lepton 및 클라우드 파트너의 GPU 인프라를 허깅페이스 개발 도구와 결합하는 구조. 2023년 처음 예고한 공동 서비스가 실제 제공 단계로 이어진 사건.

엔비디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