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방송연맹, 유로라디오 음악 교환 시작
유로라디오 음악 교환이 시작됨. 런던 퀸엘리자베스홀의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공연을 비롯해 음악 프로그램을 국경 너머의 청취자에게 전달하는 협력이 확대되었음.
유로라디오 음악 교환이 시작됨. 런던 퀸엘리자베스홀의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 공연을 비롯해 음악 프로그램을 국경 너머의 청취자에게 전달하는 협력이 확대되었음.
해리 에드워즈와 켄 노엘 등이 산호세에서 올림픽 인권 프로젝트를 조직함. 국제대회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흑인 선수들이 정작 일상과 스포츠 조직 안에서는 차별받는 현실을 문제 삼음.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로디지아의 참가 배제, 흑인 지도자 기회 확대 등을 요구하며 1968년 대회 보이콧을 논의했으며, 이후 시상식 항의의 배경이 됨.
미국 정부가 트랜싯의 민간·상업 이용을 개방함. 해군용으로 출발한 체계가 해양 조사와 상선 항법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음. 다만 신호 이용이 가능해진 것과 저렴한 수신기가 널리 보급된 것은 별개의 단계였음.
롱아일랜드의 물수리 감소와 DDT 오염을 조사하던 과학자·시민·법률가들이 환경방어기금(EDF)을 법인으로 설립. 1966년 지역 DDT 사용 중단 소송의 성과를 전국적 환경보호 활동으로 확장. 과학 자료와 소송을 결합한 규제 운동의 성장.
칼슨의 기부금으로 건설된 캘리포니아공과대학교 노이스 화학물리학연구소 개관. 자신의 기여를 사후까지 익명으로 남겨 달라고 요청한 후원 방식으로, 발명에서 얻은 부를 기초과학 연구 시설에 돌린 사례.
WMO와 국제학술연합회의(ICSU)가 전지구대기연구계획(GARP)을 추진하여 대기 순환과 예측 가능성 연구를 국제적으로 조직한 전환점. 강화된 공동관측과 수치모델 연구를 연결하고, 1970년대 대규모 현장실험과 전지구 실험으로 이어진 과학협력 기반 형성.
제5차 세계기상총회가 1968~1971년 세계기상감시계획 및 시행계획을 채택하여 1963년의 구상을 구체적인 운영체계로 발전시킨 결정. 전지구관측시스템(GOS), 전지구통신시스템(GTS), 전지구자료처리·예측시스템(GDPFS)을 세계·지역·국가 센터의 역할 분담으로 연결한 체계 정비.
야마하가 자사 최초의 색소폰을 출시. 유럽과 미국 제조사들이 발전시켜 온 악기 제작에 일본의 종합 악기 제조사도 본격적으로 참여한 사례.
시드니 채널 세븐의 스튜디오 보조로 일하던 시기에 직원 사교모임을 위해 만든 16mm 코미디 《Count Vim’s Last Exercise》의 연출. 텔레비전 현장에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작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초기 경력의 한 장면.
문정숙·신성일 주연의 1966년작 《만추》로 1967년 제10회 부일영화상 감독상 수상. 같은 작품의 최우수작품상 및 배우·촬영 수상과 구분되는 감독 개인의 수상.
UCLA에서 영화 분야 예술학 석사학위인 MFA를 취득. 연극에서 출발한 창작 경험을 영화 제작 교육으로 확장.
면도 중 스스로 상처를 내는 남자를 그린 약 5분의 단편 《The Big Shave》 제작. 깨끗한 욕실이 피로 물드는 장면과 마지막의 ‘Viet ’67’을 통해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을 비판한 작품. 벨기에 실험영화제의 지원으로 만들었으며, 부조리한 상황과 폭력을 결합하는 스콜세지 초기 연출의 특징이 뚜렷하다.
최은희가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으로 후진 양성에 참여. 한국영상자료원의 2013년 회고전 소개가 재임 시작을 1967년으로 제시한 교육 활동. 일부 지역 자료의 1969년 취임 표기와는 차이가 있는 이력.
최은희는 촬영 현장에서 쌓은 경험을 학생들의 연기 교육에 활용. 이후 자신이 연출한 《총각선생》에 학교 학생들이 출연하며 수업과 영화 제작을 연결.
최은희가 남정임·김광수 주연의 《공주님의 짝사랑》을 연출. 궁궐에 갇힌 생활을 답답해하는 숙경공주가 정해진 혼인보다 자신이 선택한 사랑을 찾는 이야기.
감독 자신이 주연을 맡았던 《민며느리》와 달리 젊은 배우들을 앞세운 사극 로맨스. 공주의 외출과 변장을 통해 여성의 선택을 중심에 놓은 두 번째 연출작.
로런스 올리비에가 맹장염으로 공연할 수 없게 되자 안소니 홉킨스가 내셔널 시어터의 《죽음의 무도》에서 올리비에의 역할을 대신함. 초기 무대 경력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기록됨.
1967년 포터 왜고너의 《The Porter Wagoner Show》에서 기존 듀엣 파트너 노마 진을 대신할 가수로 합류. 이후 RCA 레코드와 계약해 왜고너의 듀엣 파트너인 동시에 솔로 가수로 음반 활동 시작.
실험영화 《Kusama’s Self-Obliteration》을 제작함. 같은 시기 보디 페인팅과 ‘자기소멸’을 주제로 한 퍼포먼스를 활발히 전개하며 회화·설치의 반복 개념을 신체와 영상으로 확장함.
세계보건기구가 천연두 강화 박멸계획을 시작함. 백신의 광범위한 공급과 접종에 더해, 환자 발생 감시와 접촉자 추적, 환자 주변 집중 접종을 결합한 국제 보건 사업.
1965년 별세한 부친 고노 이치로의 지역 기반을 물려받아 중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해 처음 당선됨. 와세다대학교 졸업 후 종합상사 마루베니의 전신 회사에 근무하다 정계에 입문한 경로. 이후 42년여에 걸쳐 14차례 연속 당선되며 장수 의원의 길을 시작한 사건.
장준하가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뒤 국회의원 겸직 문제에 따라 『사상계』의 발행권을 부완혁에게 넘김. 부완혁은 같은 해 12월부터 발행인 겸 사장을 맡아 잡지를 운영함.
이는 창간 이래 장준하가 직접 이끌어 온 『사상계』의 경영·발행 체제가 바뀐 전환점. 다만 『사상계』의 비판적 논조와 정치적 성격은 이후에도 이어졌으며, 1970년 김지하의 「오적」 게재와 필화 사건, 강제 폐간으로 이어지는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