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선 출생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오광선. (~1967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오광선. (~1967년)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남. 이후 학교 교육과 해외 유학을 통해 서양화가와 작가로 활동하며 여성의 삶과 권리를 공론화했음.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배헌. (~1955년)
미국의 정치인 토머스 마이클 홀트. (1831년~)
대한민국의 정치인 허정. (~1988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진 뒤 새 정부가 단발의 강제 시행을 거두고 머리 모양을 개인의 의사에 맡기도록 함. 반발을 누그러뜨리고 민심을 수습하려는 정책 전환이었음.
강제가 철회되었다고 해서 단발한 사람들이 모두 상투로 돌아가거나 서양식 머리 모양의 확산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음. 이후에도 직업과 지역에 따라 상투와 짧은 머리가 공존했으며, 대한제국기에는 특정 공직 집단을 대상으로 단발을 다시 요구함.
청일전쟁(1894)으로 중국인 인부들이 돌아가고 재정난까지 겹쳐 공사가 지체되던 중, 설계·감독을 맡은 코스트 신부가 벽체 공사가 끝나갈 무렵인 1896년 2월 선종함. 뒤를 이어 프와넬 신부가 감독을 맡아 내부 공사를 속행함. 설계자의 죽음에도 공사가 멈추지 않고 완공까지 이어진 전환점.
고종과 왕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김. 을미사변 이후 왕의 신변이 위협받던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동으로, 건청궁은 왕실의 주요 거처 기능을 잃게 됨.
의병 진압을 위해 중앙 병력이 지방으로 이동한 가운데 이루어진 아관파천으로 김홍집 내각이 무너짐. 이후 새 정부는 민심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단발을 개인의 선택에 맡기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꿈. 왕의 거처 이동은 단발령의 강제 시행이 끝나는 정치적 전환점이었음.
김명순이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
한국저작권위원회 공유마당 작가 연보에 기록된 생일은 1896년 1월 20일
서울의 프랑스 외교관 르페브르가 본국에 단발령의 공포와 시행 상황을 보고함. 관리·경찰·군인은 단발을 받아들이거나 직책을 그만두어야 했으며, 이에 반대한 학부대신이 사임했다고 기록함.
르페브르는 서울에서 단발이 예상보다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판단함. 이는 당시 외교관이 수도에서 관찰하고 해석한 내용으로, 지방의 저항이나 전국적 수용 정도를 그대로 보여주는 통계는 아님. 강제 집행과 의병 항쟁을 전하는 다른 기록들과 함께 읽으면 관찰 위치에 따라 상황 인식이 달랐음을 알 수 있음.
김홍집 내각이 공포 당시 예고한 전국 시행일이 도래함. 태양력과 건양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날이기도 했으며, 관리·군인·경찰에게 단발을 요구하고 민간으로 집행을 확대함.
황현의 기록에는 순검들이 길을 막고 사람들의 머리를 자르는 모습이 나타남. 단발을 단순한 권고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강제적 상황이었으며, 상투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반발과 일상생활의 혼란으로 이어졌음.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공적 역법을 태양력으로 바꾸고 음력 1895년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삼아 새 역법을 시행함. 동시에 건양 연호를 사용해 조선의 독자 연호를 세움. 국제적 시간 체계를 수용한 근대적 제도 개편이었으나, 같은 시기 강행된 단발령은 격렬한 반발을 부름.
《맥클루어스》에서 링컨의 초기 생애를 다루는 전기 연재에 착수한 타벨. 이미 확립된 권위자의 해석을 그대로 따르기보다 링컨이 살았던 지역과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남아 있는 문서를 찾아 생애를 재구성한 접근. 가난한 개척지의 환경을 수치스러운 배경으로 처리하지 않고 그의 성격과 능력이 형성된 경험으로 제시한 서술. 연재는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으며, 뒤이어 확대된 연구는 1900년 두 권의 《에이브러햄 링컨의 생애》로 정리. 타벨의 명성을 기업 비판에만 한정할 수 없게 하는 전기 작가로서의 주요 성취.
한 살 무렵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함. 영국에서 시작된 가족의 수입 사업이 미국 생활의 출발점이 되었으나, 이후 부친의 사망과 가계의 경제적 어려움을 겪음.
법률가와 교원을 기르기 위한 법관양성소와 한성사범학교의 설립. 이후 여러 차례의 조직 개편을 거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과 사범대학으로 이어지는 근대 전문교육의 출발점.
서울대학교의 역사는 이러한 개별 교육기관의 형성 과정과, 1946년 여러 대학·전문학교를 통합해 종합대학을 만든 과정을 함께 포함하는 역사. 1895년은 일부 전신 기관의 설립 연도이며, 서울대학교 전체의 통합 설립 연도인 1946년과 구별되는 시점.
왕비 시해와 단발 강요에 대한 반발 속에서 유생들이 의병을 조직하고 농민 등 주민들이 참여함. 유인석의 제천의병을 비롯한 여러 의진이 관군·일본군과 싸웠으며, 관습 수호와 국권에 대한 위기의식이 함께 작용함.
봉기는 한날에 시작된 단일 사건이 아니라 여러 지역에서 이어진 항쟁이었음. 단발령은 이를 확산시킨 중요한 계기였지만, 왕비 시해와 일본의 정치·군사적 개입에 대한 분노도 함께 고려해야 함. 정부가 진압을 위해 중앙 병력을 지방에 파견한 상황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이동할 수 있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음.
1894년 창간된 『심리학 연보』의 첫 권을 앙리 보니스와 알프레드 비네의 편집으로 1895년 발간함. 첫 권에는 1894년 소르본 연구소에서 수행된 연구와 국제 심리학 연구 동향이 함께 수록됨.
연구소 내부의 성과집을 넘어 정기적인 학술 발표 매체를 구축하면서 프랑스 실험심리학의 제도화에 중요한 기반이 됨. 이후 비네가 연구소와 학술지를 함께 이끌며 자신의 기억·개인차·아동 연구를 지속적으로 발표하는 주요 지면으로 활용함.
조선 정부가 내부령 제8호 「종두규칙」을 반포해 영아 종두의 시행 기준을 규정함. 모든 어린이가 생후 70일부터 만 1년 안에 종두를 받도록 규정하고, 내부 위생국에 우두종계소를 설치해 두묘 제조를 맡김. 종두를 국가 보건 행정과 의무 규정의 대상으로 편입한 조치.
프랑스의 사상가 구스타브 르 봉이 《군중심리》(La Psychologie des foules)를 출간함. 르 봉은 개인이 군중 속에 들어가면 익명성, 정서적 전염, 피암시성 등의 영향으로 평소보다 충동적이고 비판적 판단이 약해질 수 있다고 설명함.
이 저작은 군중심리학의 대표적 고전으로 널리 읽혔으며, 이후 집단 행동과 몰개성화 연구의 중요한 사상적 선행 논의가 됨. 온라인 탈억제 효과와 직접 동일한 이론은 아니지만, 익명성과 책임감 약화가 개인의 행동 억제를 낮출 수 있다는 문제의식의 초기 계보라 할 수 있음.
고종의 조칙과 내부고시를 통해 성인 남성의 상투를 자르도록 하는 단발령을 공포함. 위생과 업무의 편의를 내세운 조치였으며, 국왕과 왕태자의 단발을 백성에게 제시하는 선례로 삼음.
황현의 『매천야록』은 일본 측의 압력과 대신들의 강요 속에서 고종이 머리를 잘랐다고 전함. 국왕의 자발적인 모범으로 설명하는 공식 발표만으로 당시의 상황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움. 내부고시는 전국 시행일을 이틀 뒤로 정했으므로, 오랜 관습을 바꾸는 조치에 비해 준비와 설득의 시간이 매우 짧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