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직후 일제가 안창호를 배후 관련 혐의로 체포함. 안창호는 수개월 동안 구금됐다가 혐의가 입증되지 않아 석방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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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가 독립협회에 참여하고 평양에서 관서지부 조직을 주도함. 평양 쾌재정에서 열린 집회에서 정부와 관리의 무능을 비판하고 민중의 각성과 근대화를 촉구하는 연설을 하며 대중적 명성을 얻음.
썬 마이크로시스템즈가 오픈소스 데이터베이스 MySQL의 개발사 MySQL AB를 약 10억 달러에 인수하기로 한 최종 합의를 발표. 거래 대가는 현금 약 8억 달러와 옵션 약 2억 달러로 구성. 자바와 솔라리스 등을 보유한 썬이 데이터베이스 시장으로 사업 범위를 넓히고, MySQL의 개발·지원·판매 체계를 자사 조직에 통합하기로 한 인수 발표.
비데니우스는 인수 이후 썬에서 MySQL 개발을 계속했으나 개발 방향과 조직 운영을 둘러싼 갈등을 겪음.
비데니우스·악스마르크·라르손, MySQL 창립하고 첫 버전 공개
미카엘 비데니우스가 데이비드 악스마르크, 알란 라르손과 함께 MySQL을 창립하고 첫 버전을 공개함. 비데니우스가 기존에 개발하던 데이터 처리 코드를 기반으로 SQL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면서 MySQL의 핵심 코드가 형성됨.
MySQL이라는 이름은 비데니우스의 딸 My에서 따옴. 이후 단순성과 빠른 성능을 앞세워 웹 환경에서 널리 사용되는 오픈소스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로 성장함.
비데니우스가 MySQL 공동 창립자 데이비드 악스마르크, 알란 라르손과 함께 비영리 MariaDB 재단 설립을 발표함. 기업의 소유 구조와 별개로 MariaDB 코드와 개발자·사용자 커뮤니티의 이익을 보호하는 독립 조직을 만드는 것이 목적임.
MySQL이 썬과 오라클의 인수를 거치며 기업 소유권 아래 들어간 경험을 바탕으로 MariaDB의 장기적인 개방성과 독립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조치가 됨.
비데니우스가 오라클의 썬 마이크로시스템즈 인수로 MySQL까지 오라클의 통제 아래 들어가는 것에 반대하며 'Save MySQL' 캠페인을 전개함. 오라클이 자사의 상용 데이터베이스와 경쟁하는 MySQL의 개발·라이선스 정책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유럽연합에 인수 조건 부과를 촉구함.
비데니우스와 몬티 프로그램 Ab는 MariaDB를 독립적인 MySQL 계열 대안으로 개발하면서 오라클의 MySQL 소유와 경쟁하는 구도를 형성함.
비데니우스가 MySQL 개발 방식과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의 조직 운영에 대한 불만을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고 발표함. 특히 MySQL 5.1의 품질과 출시 과정 등을 둘러싸고 경영진과 의견 충돌을 겪은 것으로 알려짐.
퇴사 뒤 몬티 프로그램 Ab를 설립하고 독립적인 MySQL 계열 데이터베이스 개발에 나섬.
MySQL 공동 창립자이자 핵심 개발자인 미카엘 비데니우스가 핀란드 올해의 소프트웨어 기업가로 선정됨. MySQL을 세계적으로 확산된 오픈소스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로 성장시키고 상용 사업 모델을 구축한 성과를 인정받음.
비데니우스와 MySQL AB가 MySQL의 자유 소프트웨어 라이선스를 GNU GPL로 변경함. GPL 버전과 상용 라이선스를 함께 제공하는 이중 라이선스 방식을 통해 자유로운 소프트웨어 배포와 기업 대상 상용 사업을 병행함.
이 모델은 이후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대표적인 사업 모델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음.
미카엘 '몬티' 비데니우스가 핀란드 헬싱키에서 출생함. 이후 헬싱키 공과대학교에서 수학하고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활동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농성하던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사제·수도자 단식기도회를 시작함. 사제단은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고 유가족의 요구를 반영한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열흘간 단식기도를 이어감.
사제단이 민주화·노동·통일 문제에 이어 대형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문제에 조직적으로 참여한 대표적인 활동임. 같은 해 창립 40주년 행사에서도 세월호 참사를 주요 사회적 과제로 제시하며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강조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사제 약 200명이 서울 용산참사 현장에서 유가족과 시민 등 약 1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국미사를 집전함. 전국 사제 1,178명이 참여한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용산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회적 갈등의 평화적 해결을 촉구함.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이어 이명박 정부 시기 사제단이 철거민·사회적 약자의 문제에 적극 개입한 대표적인 사건임. 같은 해 11월에는 서울광장에서 용산참사 희생자와 4대강 사업을 주제로 다시 대규모 위령미사를 개최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사제 약 40명이 전국 각 교구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요구하며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함. 사제단은 국가보안법을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기본권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해 온 대표적인 법률로 규정하고 폐지를 요구함.
1987년 민주화와 1989년 문규현 신부 방북 이후 사제단의 인권·통일운동이 제도 개혁 요구로 이어진 대표적인 활동임. 이후에도 사제단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요 의제로 유지했으며 2004년 국회에서 폐지 논의가 본격화되자 다시 단식기도를 진행함.
정의구현사제단, 오원춘 납치 사건 전국에 폭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장 오원춘의 납치·감금 사건을 전국에 공개하고 경찰에 사건 진상에 대한 답변을 요구함. 오원춘은 불량 감자종자 피해 농민들의 보상운동을 주도한 뒤 1979년 5월 5일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에게 납치돼 울릉도에 감금됐다가 5월 19일 귀가했으며, 6월 13일 자신의 피해 사실을 양심선언으로 공개함.
안동교구가 사건을 조사한 뒤 사제단을 통해 전국적으로 폭로하면서 농민운동 탄압과 국가기관 개입 의혹이 사회 문제로 확대됨. 이후 관련 사제들과 가톨릭 인사들이 연행·구금되며 유신정권과 천주교회의 정면 충돌로 발전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전북 전주 풍남문광장에서 '검찰독재 타도와 매판매국 독재정권 퇴진 촉구' 시국미사를 열고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함. 사제단은 윤석열 정부의 3·1절 기념사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배상 제3자 변제안, 한일 정상회담 등을 비판함.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사제단이 정권 퇴진을 명시적으로 요구하며 개최한 첫 시국미사임. 사제단은 미사 뒤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전국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시국미사를 이어가기로 결정하면서 정부 비판 활동을 전국 단위로 확대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이 전북 군산 수송동성당에서 '불법 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시국미사'를 집전함. 문규현 신부를 비롯한 사제들은 국가기관의 제18대 대통령선거 개입 의혹에 대한 책임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다며 사퇴를 요구함.
미사 뒤 참석자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행진을 진행함. 대통령 사퇴 요구와 미사 과정에서 나온 일부 발언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보수단체가 강하게 반발하면서 사제의 정치·사회 참여 범위를 둘러싼 논쟁이 확대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추기경의 궤변〉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진석 추기경의 4대강 사업 관련 발언을 공개적으로 비판함. 정진석이 앞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입장은 4대강 사업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고 해석하자 사제단은 주교회의의 결정을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함.
주교회의는 같은 해 3월 4대강 사업이 자연환경에 치명적 손상을 줄 위험이 있다고 우려를 표명한 상태였음. 사제단이 현직 추기경을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4대강 사업을 둘러싼 한국 천주교 내부의 견해 차이가 표면화됨.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국민존엄을 선언하고 국가권력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를 열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의 재협상을 요구함. 사제단은 정부가 쇠고기 협상과 촛불집회 대응 과정에서 국민의 요구를 외면했다고 비판하고 비폭력 원칙을 강조함.
미사 뒤 사제단은 십자가를 앞세워 시민들과 서울 도심을 행진하고 단식기도에 들어감.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이 격화되던 촛불집회에 종교계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평화·비폭력 집회 기조가 다시 강조되는 계기가 됨.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통해 삼성그룹이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 등을 이용해 대규모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는 의혹을 폭로함. 김용철은 자신의 명의로 관리된 것으로 주장한 자금과 금융자료 등을 근거로 제시함.
삼성은 관련 의혹을 부인했으나 김용철과 사제단은 이후 여러 차례 기자회견을 열어 정·관계 및 법조계 로비 의혹까지 추가 제기함. 논란이 확대되면서 특별검사 도입 요구가 제기됐고, 같은 해 11월 국회에서 삼성 비자금 의혹을 수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법이 의결되는 계기가 됨.
문규현 신부가 임수경과 함께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어 대한민국으로 귀환함. 정부의 사전 허가 없이 북한을 방문한 뒤 판문점을 통해 직접 귀환한 전례 없는 사건으로 국내외의 큰 관심을 받음.
귀환 직후 문규현과 임수경은 공안당국에 연행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음. 사제단의 문규현 파견과 두 사람의 판문점 귀환은 냉전 말기 한국 사회에서 민간 통일운동의 방식과 국가보안법 적용을 둘러싼 논쟁을 확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