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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Jeju 4·3 Uprising and Massacre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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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타임라인 41건 · 194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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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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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ent 38건

제주북공립국민학교에 열린 3.1절 기념식을 마친 직후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채여, 소란 발생. 기마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무시하자 주변 군중이 몰려들어 돌을 던지고 경찰서까지 쫒아감. 경찰은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판단, 시위대를 향해 발포, 6명이 사망, 8명이 중상. 희생자 중에는 평범한 일반인 포함.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민관 총파업. 경찰, 사법기관 제외한 대부분의 행정기관까지 대부분 파업 참여하며 지난 3·1절 기념행사 발포한 경관의 처단과 경찰 책임자의 인책사직을 강경히 요구. 심지어 경찰도 일부 파업 동참.

군정 실시 이래 처음보는 광범위한 총파업이 일단락되고, 파업 해결책과 범죄자 재판에 대해 협의 중이라고 알려짐. 이날까지 파업을 선동한 150명을 검거하였다고 조병옥 경무부장이 발표. 당시 미군정은 3월 15일 전남·북 응원경찰 222명, 3월 18일 경기도 응원경찰 99명을 증파.

조병옥 경무부장이 제주 3·1절 발포사건과 총파업에 관한 담화에서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하고, 사건이 북조선과의 통모로 발생했다는 취지의 주장을 발표함. 제주4·3평화재단은 이러한 인식과 총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이 이후 대규모 검속과 탄압으로 이어졌다고 정리함.

3·1절 발포 사건 이후 고조된 도민들의 저항 의식과 미군정의 강압적인 통치에 반발한 상태에서, 남로당 제주도당을 중심으로 미군정의 단독선거 추진에 반대, 총파업과 무장 봉기 발생.

당시 상황

  • 당시 전후 한국의 독립 문제 관련 1946년 11월 14일, 제2차 유엔총회에서 결의안이 채택
  • 이 결의안을 근거로 유엔은 한국 내 선거와 국회 구성, 정부수립 등의 문제를 지원하기 위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1947년 1월 한국에 파견
  •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한반도에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를 추진
  • 소련은 1948년 1월 22일,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
  • 1948년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위원단이 접근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선거 감시를 결정. 즉, 5월 10일 남한 단독 선거로 최종 결의

당시 김구, 김규식 등은 1947년 말부터 남한 단독 선거 반대, 남북 협상 주장을 공개적으로 펼치고 있었음. 단독 선거는 분단의 교착으로 이어지고 이는 미국의 단독 정부 수립 전략이라고 해석하했기 때문. 따라서, 1948년 초부터 파업, 시위, 선거 저지 운동 등 다양한 방법이 준비되고 있었음.

새벽 2시, 남로당 김달삼 등 350여 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가 무장대에 협상을 요청하는 전단을 비행기로 살포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독립신보》 1948년 4월 30일 보도의 ‘지난 22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항공 살포일을 4월 22일로 정리한 내용.

《남선신문》 5월 3일자 《靈峰漢拏의 死火山鳴動》 역시 약 일주일 동안 산기슭 일대에 수차례 전단을 뿌렸으며, 향토의 평화 회복을 위해 손을 잡자는 취지의 김익렬 연대장 전단이 다시 살포됐다고 보도한 기록. 이 기사의 5월 3일은 발행일이고 머리말의 통신 발신일은 5월 2일로, 전단 살포 당일과 구분되는 날짜. 협상 권고와 귀순 요구가 이어진 과정에 관한 당시 보도.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 김익렬과 무장대 지도자 김달삼이 대정면 구억리에서 만나 무력 충돌의 중단과 무장대의 하산 방안을 협의한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와 제주4·3평화재단 사건일지가 1948년 4월 28일로 정리한 회담.

김익렬의 회고를 인용한 공식보고서에 따르면, 합의의 주요 내용은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지하고 산발적 충돌은 연락 미달로 간주하되 ‘5일 이후’의 전투는 약속 위반으로 보며, 무장해제는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약속이 깨지면 전투를 재개하며, 무장해제와 하산이 원만히 이루어지면 주모자의 신병을 보장한다는 내용. 귀순 절차는 회담 다음 날 모슬포 연대본부와 제주읍 비행장에 수용소를 설치하고 서귀포·성산포 등으로 확대하되, 군이 직접 관리하고 경찰의 출입을 통제하는 구상. 서명된 합의문 원본이 아니라 김익렬의 회고에 따라 전해지는 구체 조항.

회담 뒤에도 납치·살해와 5월 1일 오라리 방화, 군정 수뇌부의 공격 방침 등이 이어지며 지속적인 충돌 중단으로 연결되지 못한 협상. 한편 박찬식의 연구는 1948년에 작성·발표된 김익렬의 《참전기》에 회담일이 4월 30일로 적혔다고 지적한 내용으로, 공식 연표의 4월 28일과 날짜 기록의 차이가 남아 있는 사건.

이들은 이후 행방불명된 것으로 기록. 당시 오라리 지역은 우익 단체인 대동청년단과 좌익 무장대 간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곳. 이 방화사건은 평화회담을 깨고 5·10 단독선거를 저지하려는 무장대 측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 단체의 충돌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 피해를 양산한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로 기록.

당시 오라리 연미마을에 거주하던 대동청년단 단원의 부인 2명은 마을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제주시 읍내로 피신. 이들은 살림살이를 챙기기 위해 잠시 마을로 다시 들어왔다가, 이를 인지한 마을 주민들(무장대 동조 세력)에 의해 납치. 마을 뒷산인 민오름으로 끌려가 이 중 1명은 사망.

1948년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가옥이 불에 탄 사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앞선 무장대의 우익계 인사·가족 납치와 살해, 장례식 뒤 우익청년단원들의 방화, 이어진 무장대의 청년단 추격과 경찰 출동을 구분하여 서술하고, 가옥 방화는 우익청년단원들의 행위로 판단한 내용.

같은 보고서에 따르면 김익렬 제9연대장은 현장 조사를 거쳐 경찰의 후원 아래 우익청년단체가 불을 질렀다고 판단하여 보고한 경위. 당시 경찰은 무장대 소행이라고 보고했으며, 김익렬의 조사 결과와 미군정 측 대응의 구체 경위는 그의 회고와 관계자들의 후대 증언을 함께 토대로 정리된 내용.

불타는 마을을 공중과 지상에서 촬영한 미군 영상 《제주도의 메이데이》가 남아 있는 사건. 공식보고서는 이 영상의 구성과 무장대 책임론을 강경 진압 정당화의 맥락에서 분석한 내용이며, 영상의 존재만으로 미군이 방화를 사전에 직접 지시했다는 사실까지 입증되는 것은 아닌 자료적 한계. 4월 말 협상이 이행되지 못한 과정의 중요한 사건으로, 이후 공격 명령과 지휘관 교체까지 이어진 정책 변화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경위.

1948년 5월 5일 제주에서 딘 군정장관, 안재홍 민정장관, 조병옥 경무부장, 송호성 경비대사령관과 김익렬 제9연대장 등이 참석한 수뇌회의. 딘 일행의 이날 제주 방문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전한 당시 신문 보도로도 확인되는 일정.

공식 진상조사보고서가 인용한 김익렬의 회고에 따르면, 김익렬은 무력에 의한 위압과 선무·귀순공작을 병용하고 무장세력과 일반 주민을 구분하며 경찰을 통합 지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입장. 조병옥의 강경 진압 주장과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에 맞서 몸싸움으로 이어졌다는 구체 경위는 김익렬의 회고 증언.

김익렬은 다음 날 제9연대장직에서 해임되고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경과. 당시 방문 보도, 당사자의 후대 회고, 공식보고서의 정책 전환 해석을 서로 구분하여 이해해야 하는 사건.

1948년 5월 6일 통위부 특명 제52호에 따라 제주 주둔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이 김익렬 중령에서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된 인사. 후임 박진경은 중령으로 취임한 뒤 대령으로 진급한 지휘관.

김익렬이 전날 군정 수뇌회의에서 선무·귀순공작과 경찰 통합지휘를 주장하고 조병옥과 충돌한 뒤 이루어진 교체. 공식 진상조사보고서는 이를 5·10선거를 앞두고 사태를 조기에 진압하려는 군정 수뇌부의 정책 전환과 연결하여 설명한 내용. 회의 중 충돌만을 유일한 사유로 명시한 인사문서가 확인된 것은 아니며, 연대장직 해임을 군에서의 파면이나 제적으로 확대해서는 안 되는 인사 구분.

후임 박진경의 지휘 아래 진압작전이 확대되고 뒤이어 제11연대 편제로 이어진 부대 개편. 5월 6일의 연대장 교체와 이후의 부대 개편은 서로 구분되는 과정.

1948-05-10 event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곳 무효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접근할 수 있는 남한 지역에서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가 실시됨. 남한에 배정된 200개 의석 가운데 제주 4·3의 영향으로 선거가 무효가 된 북제주 갑·을을 제외하고 198명의 의원이 선출됨. 이승만은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당선되었고, 5월 31일 열린 국회에서 의장으로 선출됨.

소련이 위원단의 북한 입경을 거부하면서 남북 총선거가 실현되지 못하자 유엔소총회는 선거 가능 지역에서의 선거를 권고했음.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이를 지지했지만 김구·김규식 등은 분단 고착을 우려해 남북협상을 추진했고, 좌익세력도 단독선거에 반대했음. 총선거는 대한민국 정부를 구성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통일정부를 둘러싼 갈등 속에서 치러졌음.

국회선거위원회에서는 북제주군 갑, 을의 투표가 원만히 시행되지 못하여, 군정장관에게 무효선포를 건의. 결국 무효 처리됨

  • 북제주군 갑구: 73투표구 중 31개구 투표 (등록유권자 27,560명 투표자 11,912명)
  • 북게주군 을구 -61투표구 중 32개구의 투표 (등록한 유권자 20,917명, 투표자 9,724명)

선거 후 이날까지 제주도의 선거결과만이 국회선거위원회에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고 함.

1948년 11월부터 5개월 동안 진행된 초토화 작전으로 진압군은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함. 중산간 마을 134개가 모두 불에 탐. 제주 4.3 사건 희생자의 2/3인 9,700 여명이 초토화 작전으로 목숨을 잃음.

1948년 10월 19일,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일부 군인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 봉기는 순천 등으로 확대되었고 정부군의 진압 과정에서 군인·경찰뿐 아니라 다수의 민간인이 희생됨. 발단인 10월 19일과 이후 수일간 이어진 진압 및 민간인 희생을 구분해 이해할 필요가 있는 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일부 병력이 제주4·3 진압을 위한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했음. 지창수 등 남로당 계열 군인들이 주도한 봉기는 여수와 순천 및 전남 동부로 확산되었고, 이 과정에서도 경찰과 우익 인사 등에 대한 살해가 발생했음. 정부수립 약 두 달 만에 발생한 이 사건에 대해 이승만 정부는 군사 진압을 추진했음.

정부는 10월 21일 광주에 토벌 지휘부를 설치하고 22일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음. 정부군이 주요 지역을 다시 장악하는 동안 주민들을 모아 반란 가담자를 가려내는 색출이 진행되었고, 고발이나 지목만으로 법적 절차 없이 처형하는 일이 일어남. 이후 김지회가 지휘를 맡은 반란군 일부는 지리산 등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군·경의 토벌과 주민 희생은 도시 탈환 이후에도 이어짐.

여순사건은 이승만 정부가 군 내부의 좌익 세력을 제거하는 숙군을 확대하고,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는 계기가 됨. 진압 과정의 민간인 집단희생과 유족에 대한 낙인은 장기간 지속됨.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의 해설은 정부군의 진압과 부역자 색출을 국가폭력의 구체적 과정으로 설명함.

제주4·3 진압 과정에서 이승만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음. 정부수립 이후의 강경 진압과 민간인 집단희생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을 보여주는 주요 사건임.

1948년 11월 17일 이승만은 대통령령 제31호로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제주 주둔 제9연대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지정했음. 제주4·3은 1947년 3·1절 경찰 발포와 뒤이은 탄압,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의 봉기 등 미군정기의 사건에서 시작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전의 발발 과정과, 8월 15일 이후 이승만 정부가 수행한 진압은 시기와 지휘체계를 구분해야 함.

정부수립 후에는 제9연대장 송요찬의 중산간 통행금지 포고, 마을 소개와 소각, 재판 없는 주민 살해가 확대됨. 이승만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와 전남 사건을 철저히 진압하고 가혹한 탄압으로 법의 권위를 세우라는 취지의 강경 방침을 밝힘. 계엄은 1948년 12월 31일 해제되었으나 주민 집단희생은 이후에도 계속됨.

정부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강경 작전을 수행한 제9연대장과 제2연대장에게 1차 책임을, 계엄 선포와 강경작전 지시를 한 이승만에게 최종 책임을 귀속했음. 이는 대통령의 확인된 정책 지시와 통수 책임에 대한 판단으로, 개별 마을 학살의 현장 명령을 모두 대통령이 직접 내렸다는 뜻과는 구별됨. 보고서는 미군정과 미군사고문단의 책임, 무장대의 민간인 살해도 지적했으며, 전 기간의 인명 피해를 잠정적으로 2만 5천~3만 명으로 추정했음.

계엄령 포고 제1호로 교통제한, 우편통신·신문잡지 등 검열, 부락민 소개, 교육기관에 대한 제한, 처소벌채 급 도로의 수리보전 급 폭동에 관한 벌칙 등 7종목의 세칙 발표.

약 한 달 보름만에 계엄령 해제. 이 계엄령은 법적 근거 없이 선포된 불법적인 조치였고, 수많은 무고한 희생을 나은 학살의 배경이 됨.

참고로 계엄법은 1949년 11월 24일 법률 제69호로 최초로 제정.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주민들이 하산하여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 실제로 많은 주민이 하산, 귀순.

5·10 총선에서 무효 처리된 제주도 2개 선거구 정상 투표 완료. 북제주군 갑 독촉국민회 홍순녕, 북제주군 을 대한청년단 양병직 당선.

무장대 제2대 사령관이었던 이덕구가 경찰 토벌대와의 교전 끝에 사살. 김달삼 월북 이후 무장대를 지휘하던 이덕구 사살로 실질적인 무장항쟁 세력은 와해.

한 언론이 "제주도 반도사령관 이덕구는 지난 7일 경찰부대에 사살됐다. 즉 제주경찰서 화북지서 김영주 경사가 지휘하는 경찰부대는 지난 7일 오후 4시께 속칭 작은 가오리 부근 정글 속에서 반도사령관 이덕구 부대와 교전 끝에 이덕구를 사살하는 한편 그의 보신부하 1명을 포로로 잡았는데 이덕구 시체는 방금 제주경찰서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고 보도.

제주 4·3 사건 와중인 1949년 군법회의에서 사형이 결정된 민간인과 1950년 예비검속 대상자 등이 정뜨르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 일대에서 군에 의해 총살·암매장됨. 수백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주 최대 규모의 학살터. 공항 부지가 현대사의 비극을 품게 된 사건.

6·25 전쟁 발발 직후 경찰과 군이 제주도에서 혐의가 불분명한 민간인을 보도연맹원, 요시찰자 등으로 분류해 사전 구금(예비검속) 후 불법 학살. 모슬포 섯알오름 탄약고 터, 제주읍 정뜨르 비행장 등에서 250여 명(총 600~700여 명 추정)이 억울하게 희생. 국가 공권력에 의한 무고한 민간인 학살.

또한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

2007년 10월 제주국제공항 남북활주로 북서쪽 끝에서 4·3 희생자 유해 발굴이 시작됨. 1949~1950년 학살돼 60년 가까이 암매장돼 있던 유해와 유류품 수백 점이 수습되었고, 이후 일부 희생자는 70여 년 만에 신원이 확인됨. 공항 부지에 묻혔던 현대사의 비극이 세상에 드러난 사건.

milestone 2건

노무현 대통령이 제주도민과의 간담회에서 제주 4·3 사건의 진상조사 결과에 근거해 국가권력의 잘못으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됐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함. 2003년 10월 15일 정부 진상조사보고서 확정에 이어 국가 차원의 책임 인정과 희생자 명예회복, 평화공원 조성 등 후속 조치를 약속한 역사적 전환점.

제주4·3평화재단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가 추진한 첫 4·3 영화 시나리오 공모에서 ㈜렛츠필름이 응모한 《내 이름은…》이 장편 극영화 부문 당선작으로 선정됨. 장편 극영화 시나리오 65편 가운데 선정됐으며, 오라리 방화사건을 모티브로 4·3의 기억과 이름의 문제를 다룬 원안임.

release 1건

2021년 9월 9일 제주 4·3 사건의 학살과 기억을 좇는 장편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를 문학동네에서 출간. 두 여성의 여정을 통해 국가폭력으로 스러진 이들에 대한 애도를 다룬 작품. 눈과 침묵의 이미지로 고통을 증언한 서사.

한강 (작가)

그 외 사실들 2건

기록

  •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2003년 12월 15일 | 출처: jeju43peace.or.kr
  • 제주 43을 기억하며 국가 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민형사 시효제도를 폐기하겠습니다. 2026.3.29 대한민국 대통령 이재명

    2026년 3월 29일 | 출처: www.youtube.com
갱신 2026-06-20